무한자유의 허구성에 맞설 집단적 상상력 키우자
무한자유의 허구성에 맞설 집단적 상상력 키우자
  • 김영옥 /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09.03.06 11:18
  • 수정 2009-03-06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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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자 40만 명의 추모객들이 명동성당을 찾았다. 가슴 옥죄는 원통하고 억울한 소식만 전하던 언론은 모처럼 사랑과 감동이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내 반갑기 그지없다는 듯 연일 명동성당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10만에서 20만, 드디어 40만. 며칠을 계속해서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라는 세 단어가 우리의 식탁과 일터와 잠자리에 기도문처럼 송신되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추모객들 중에는 신도가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애도의 행렬에 참가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가끔 있었지만, 40만 명의 추모객이라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나아가 이들은 과연 무엇을 애도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슬픔·애도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계기’였을 뿐이다. 이미 잔을 가득 채운 물, 잔 밖으로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단 한 방울의 물만 있으면 되는 그런 상황, 계기를 갈망하고 있던 ‘어떤 상황’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사랑하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깊은 슬픔에 빠진다. 애도는 단기간에 끝날 수도 있고, 끝내 종결되지 않아 자살 같은 자기 파괴의 극단적인 길을 가기도 한다.

사랑하던 대상은 연인일 수도, 신념일 수도, 어떤 가치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단순한 슬픔 차원의 애도와 이와 달리 깊고 어두운 무덤 안으로의 칩거 같은 멜랑콜리를 구분했다.

이 애도 논의를 정체성 이론으로 발전시킨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상실은 아주 묘한 구조를 띤 금기와 관련되어 있다. ‘너는 이것을 가질 수 없어, 이것을 사랑하면 안 돼. 그러나 이것의 상실을 너 스스로 인정할 때 이것은 네 안에 남아 너를 만들어 줄 거야.’ 떠나보냄으로써 영원한 합체를 누릴 수 있다는 이 모순된 논리. 버틀러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특히 가부장제 안에서의 이성애주의를 구성하는 근본 토대가 된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한 사람들은 그가 유산으로 남긴 저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그 말이 체현하는 어떤 평화롭고 따스한 삶, 평등하게 행복한 어떤 삶을 사랑했고, 그것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여기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이 상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삶의 조건이고 구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걸핏하면 울고, 걸핏하면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치유 혹은 더 나아가 치료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단어가 되어버렸고, 그 밑바탕이 되고 있는 우울증 역시 거의 모든 사람이 때때로 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일상적 삶을 묘사하는 기본 정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우울증은 프로이트나 버틀러가 논의로 삼고 있는 금기와 상실, 그리고 애도의 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이제 상실과 그에 따른 우울은 금기가 아니라 새로이 ‘부과된’ 완전한 자유, ‘신자유’와 상관이 있다. 물론 동성애를 비롯해 이성애 중심주의를 거스르는 성적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금기의 논리가 작용하지만, 오히려 규범과 질서, 순응·거부 선택의 문제 등 모든 것이 ‘자, 완전한 자유를 줄 테니 네 삶의 주인이 되어라. 기획하고 관리하고 팽창시켜라’라는 지상과제로 대체되어버리는 상황에서 사실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상실의 박탈이다. 상실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이 밋밋한, 그럼에도 농도나 밀도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우울과 슬픔인 것이다.

한 손에는 자기계발서를 들고, 또 다른 손에는 각종 ‘치유’ 프로그램 팸플릿이나 안내서를 들고 창피한 얼굴을 가리는 슬픈 초상들이여!(왜 창피하냐고? 남들 이만큼 성공할 동안 너는 뭘 했느냐는 초자아의 목소리에 대꾸할 말이 없기에)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성공한, 즉 고정적인 일과 수입이 있는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비전이나 희망도 없는 정체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낙오자’로 느끼고 절망하는 현실이다.

치유인문학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철학상담치료학회가(심지어 치유도 아니고 치료다) 발족하고, 독서치유, 미술치유, 시네마치유, 음악치유 등 모든 예술창작·향유 행위를 치유나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이 결핍과 부정의 시대에 진정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웃음을 되찾고,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금기 타파와 상실의 권리를 되찾는 게 아닐까.

번성하는 ‘치유산업’을 직면하며 눈물과 웃음의 진원지가 나의 무능력이 아니라 사회구조, 돈의 논리, 타락하거나 부재한 정의라는 것을 확인하자고, 무한자유의 허구성에 맞서는 집단적 상상력과 힘을 키우자고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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