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가드너는 ‘열정과 기질’(Creating Minds)이라는 책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T S 엘리엇, 마사 그레이엄, 마하트마 간디 등의 인물들이 각자 처한 환경에서 자신이 가진 창조적 역량을 어떻게 발휘했으며, 그것이 주변 사회와 전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고 있다.

가드너는 이 책에서 창조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창조성의 10년 규칙’이었다. 즉 창조성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데 필요한 숙성의 시간을 최소한 10년으로 본 것이다. 그 10년은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창조성이 성숙하는 데 필요한 ‘내재적 뿌리 내리기 시간’ 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평범한 개인들에게 이 책에서 언급한 ‘위인’들은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들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창조성이란 지극히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것이 모여서 전체 사회의 창조적 역량이 강화되는 것이라고 놓고 본다면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 살펴보자. 우리들 개개인은 각자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평생 최소한 10년을 투자하고 있는가. 아니, 투자할 수 있는 사회인가. 일상적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고 있는 시간 이외에 개인의 창조력을 키우는 시간을 10년이 아니라 최소한 1년이라도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주어진 현실의 열악한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적 삶을 희생하면서 가혹할 정도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내 속에 잠자고 있는 창의성을 개발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대부분이 일상의 바퀴 속에 스스로를 던져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창조성 자체가 평범한 개인의 삶과는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저 몇몇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창의성이 개발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걷기 시작하자마자 주입식 공부에 시달려야 하는 아이들, 창의적인 인재가 사회 변화의 역군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권위적인 체제 속에서 입을 꼭 다물고 살아야 하는 성인들, 가시적 실적과 성과만으로 개인적 역량이 획일적으로 평가되고 끊임없이 통제되는 조직 속에서 자신의 몸값을 점수로 환산하기 바쁜 직장인들. 이런 환경 안에서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 숨 막혀 하는 창의성은 언제나 빛을 볼 수 있을까?

인간을 만들고 길러내는 데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먼저 자기 내부에 잠자고 있는 창의성을 끄집어내보는 것은 어떨까. 사회적 혁신의 원동력이 변방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사례는 무수히 많다. 여전히 소외와 씨름하고 있는 여성들이 그 소외를 창조성으로 승화시켜보는 역발상을 실천에 옮겨보는 것이다. 그렇게 발현된 창의성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밝혀내보자.

일단 시작해보면 창의성을 개발한다는 것이 사실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님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서 탄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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