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남편 증후군…주부가 아프다
은퇴 남편 증후군…주부가 아프다
  • 전희진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09.02.20 13:04
  • 수정 2009-02-20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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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 조기 실직이 가장 큰 원인
"집에서 노는 남편 보면 가슴 답답"

# 전업주부인 혜주는 대기업에서 ‘잘나가던’ 남편이 갑자기 명예퇴직을 당하면서 맞게 된 생활환경의 변화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남부럽지 않게 풍요로운 생활을 해온 그는 좋아하는 운동도 계속 해야 하고 자녀의 유학비도 대야 하는데, 돈 못 벌어오고 집에만 있는 남편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생활은 점점 팍팍해져 유학 중인 자녀들 생활비도 끊고 집도 작은 규모로 줄여 옮겨가야 할 판. 상황을 절망스럽게 만든 남편이 미워 마주하면 싸우거나 아니면 아예 말을 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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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극본의 TV 드라마 ‘홍 소장의 가을’에 나오는 한 가정의 얘기다. 2004년에 방영돼 가족애와 형제애, 명퇴와 가족의 붕괴 문제를 그려 긴 여운을 남겼던 이 드라마가 최근 다시 방송됐다.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편성으로 풀이된다. 

최근 경기 침체가 깊어지면서 기업 구조조정, 폐업 등 고용 불안 현상에 따라 조기 퇴직하거나 실직하는 중년 남성들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은퇴 남편 증후군’으로 속병을 앓는 주부들이 생겨나고 있다. 얼마 전, 취업포털 ‘커리어’가 지난해 하반기 이후 취업시장과 직장생활에 등장한 신조어 및 유행어를 정리한 바에 따르면, 주부들이 실직한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적·육체적 이상을 겪는 ‘은퇴 남편 증후군’이 포함됐다.

은퇴 남편 증후군은 원래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생겨난 말로, 은퇴 후 별다른 일 없이 집에서만 지내고 아내의 주위만 맴돌며 귀찮게 구는 남편을 신발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낙엽에 빗대어 ‘젖은 낙엽’이라고 불렀다.

직장인 주부 정모(38)씨는 중소 건설업체에 근무하던 남편(42)이 지난해 말 어려운 회사 사정으로 실직하게 되면서 마음의 병을 얻었다.

맞벌이로도 빠듯한 상황에서 혼자 생활비를 벌어 가계를 꾸려나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 봄 중학교에 입학하는 딸아이 교육비에 대한 걱정도 태산이다. 언제 남편이 재취업될지 모르는 상황에 속이 타들어 간다. 정씨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을 돕기는커녕 손 하나 까딱 않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남편의 모습만 눈에 들어온다”며 “그때마다 화가 나고 속상해 밥맛도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업주부 진모(59)씨는 음식점 폐업으로 주차관리 일자리를 잃은 남편(63) 때문에 다시 화병이 도졌다.

이미 진씨의 남편은 50대에 사업을 실패한 후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백수 경력만 10여 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상실과 무능력함에 실망한 지 오래다.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대는 남편이 꼴 보기 싫고 밥 먹는 모습만 봐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우울증에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눈 밑이 떨리는 증상까지 생겨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든데 남편으로 인한 심적·육체적 고통으로 더 괴롭다.

진씨는 “자식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언제쯤 이 어둡고 긴 터널의 끝이 보일지 암울하기만 하다”며 “자식들에게도 미안하고 나도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들어 이혼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은퇴 남편 증후군으로 인해 화병, 우울증, 불면증, 소화불량, 피부 트러블 등 다양한 질환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나눔신경정신과 이영호 원장은 “스트레스, 우울증과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취미생활 등 남편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남편으로 하여금 가사 일을 돕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주부들이 이전에 해오던 활동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남편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말아야 지치지 않고 갈등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은퇴 남편 증후군이 단순히 주부들의 건강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황혼이혼으로 인한 가족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조사한 노년 이혼 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 황혼이혼 상담 건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며, 2007년 여성 이혼 상담이 216건으로 10년 전보다 2.2배가량 증가했다.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은 “부부 간 갈등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남편의 퇴직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요즘 들어 은퇴 남편 증후군을 겪는 주부들뿐 아니라 남편들의 이혼 상담도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상담소는 이와 관련한 무료 법률상담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으며, 중년기 남편의 은퇴로 인해 발생하는 가정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지난해 퇴직 남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를 통해 가족의 변화와 남성의 역할, 퇴직 남성이 알아야 할 법률, 가족 간의 의사소통, 5060세대를 위한 금융자산 운영 전략 등의 교육을 진행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남편이 돈을 벌고 부인은 가사 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된 성 역할 인식에서 탈피해 역할을 재정립하고 유연한 성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변화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바꿀 필요가 있으며 가족 내의 지위·역할 변화에 따른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 연구위원은 무엇보다 전문 인력인 퇴직 중년 남성들을 파트타임으로 활용하는 등 재취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남성들 스스로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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