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미술사의 보기 드문 ‘허스토리’

특히 이 책은 대표적인 여성 미술가 ‘나혜석’과 ‘천경자’에 주목한다. 두 인물을 통해 여성 미술가가 나라 밖의 문화제도와 문화담론에 의지하고, 이로 인해 민족주의 담론 중심이었던 한국미술사에서 타자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기술한다. 두 여성의 공통점은 ‘신여성’이다.

“여자가 미술가가 된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20세기 초 조선의 ‘여성성’과 충돌하는 행위이며 근대적 ‘여성성’을 실험하는 행위였다. 내외법과 삼종지도를 당연시하는 조선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여성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여성은 달랐다. 신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의 직업을 요구했고 교육받을 권리를 이야기했다. 이는 조선의 섹슈얼리티에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의 여성성이었는데, 실상 여성 예술가의 탄생은 이 근대적 여성개념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본문 45쪽).”

1924년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한국여성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신여성 천경자. 저자는 그의 ‘한’에 주목한다. 천경자가 유독 곱고 화려한 색채를 많이 쓴 것도 한이 많아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교 3학년 때 작가로서 입지를 마련한 뒤 교수자리에까지 이르렀던 그가 왜 자서전에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란 서글픈 제목을 달았을까. 저자는 “당시 민족주의 담론이 요동치던 미술사는 색채, 세필을 금기시하고 문인화적 추상만 우리 미술의 미적·예술적 잣대였다”며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화려한 색채와 세필 묘사가 특징인 천경자의 작품은 핍박의 대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가 조선과는 배타적인 의미로 쓰이던 20세기 초에 그의 작품세계는 인정받을 수 없었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주장하며 가부장제 자체를 부정했던 나혜석을 두고 저자는 “그의 여성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거세게 불어 닥쳤던 인간존엄성을 긍정하는 여타 문화적 움직임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외에도 책은 현대미술의 형식 패러다임이 어떻게 여성의 역사를 외면하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구조주의, 탈식민, 해체 등 포스트모던 문화이론을 동원해 한국 현대미술사를 성찰하는 방식은 젠더관점에서 미술사를 재해석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저자 신지영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동대학원 영문학과와 미술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이수했으며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문화연구, 미술사로 박사를 마쳤다. 역서로는 ‘앤디 워홀’이 있다.

‘꽃과 풍경’ (신지영 지음/ 미술사랑/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