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가면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단아한 한옥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임진왜란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머물며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옥연정사다.

국보 132호로도 지정된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참담함을 눈에 보듯 선명하게 표현한 명작이다. 임진왜란이 낳은 영웅 이순신을 수군절도사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유성룡이니,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서로 아꼈던 두 사람의 닮은 행적이 예사롭지 않다.

1591년 봄, 조선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1년간의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평정한 후, 선조의 친서를 전하고 일본 정세를 살피기 위해 특별히 파견된 사람들이었으니, 요즘말로 하자면 ‘대통령 특사’였던 셈이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의 보고는 내용이 엇갈렸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김성일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징조가 없으며 오히려 황윤길이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조선은 무방비 상태에서 그 다음해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국가원수의 특명을 받아 파견된 고위 외교관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보고가 서로 엇갈렸을까?

후일 역사는 당시 동인에 속했던 김성일이 황윤길이 속한 서인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다른 의견을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김성일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지키려는 얄팍한 욕심에 젖어 국익이라는 대의를 저버리고 말았는데, 한 외교관의 사심(私心) 때문에 지불해야 했던 대가치고는 임진왜란은 너무나 참혹한 희생이었다.

외교관은 ‘국가가 공인한 스파이’라는 말이 있다. 외교관은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주재국의 상황을 살피고, 먹이를 살피는 표범처럼 소리 내지 않고 정보를 수집하며, 결정적 순간에 달려드는 사자처럼 정확하고 단호한 판단력으로 정세를 보고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받쳐주는 가장 기본은 바로 유리알처럼 투명한 사심 없는 애국심이다. 그래서 외교관의 보고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신뢰할만해야 한다. 개인적인 승진이나 명예, 학연이나 지연 같은 소집단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이 나의 국가를 위해 최선인가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외교관 자질 중에 첫째다.

옥연정사에서 유성룡 선생의 절통함이 배어있는 징비록을 읽으며, 훗날 역사가 후손들이 나를 어떻게 기록해줄까 생각해 본다면 누군들 두렵지 않을까?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나라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사심 없이 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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