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자친구와 버스를 타게 되었다. 내 버스카드로 같이 타느라 기사가 1800원을 눌러주었는데 내 뒤의 60대 중반 아저씨가 새치기를 하면서 옴팡 1800원을 찍고 말았다. 다행히 기사가 환불해 주었는데, 이 아저씨 아무래도 꺼림칙한지 운전에 전념해야 할 기사에게 이런저런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침 기사석 바로 뒷자리의 아주머니가 대신 뭐라고 설명을 해주자 아저씨는 다짜고짜 반말로 소리를 냅다 질러 ‘조용한 차중’을 위협했다.

“모르면 가만있어. 뭘 안다고 나서는 거야? 이게”라며 삿대질까지 했다. 싸움이 나지 않을까 했는데 아주머니가 씩씩하고 깔끔하게 정중한 사과를 올렸다.

“아저씨, 죄송해요.”

아주머니도 예순이 다 되어 보였다. 사과를 받은 아저씨는 더 기세등등해졌다. 도가 좀 지나치다 싶었는데 “미안합니다” 또 한 번의 씩씩한 여자 목소리가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아주머니의 일행이었다. 정류장에 내리면서 두 아주머니는 확인사과까지 한 번 더 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나도 우리 버스카드가 고장 난 적이 있어서 알려드리려고 했어요. 죄송해요.” 아저씨는 입이 얼어붙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 친구는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가래를 뱉어버리듯 말했다. “에이, 좀팽이, 남자 망신 다 시켰어! 아무튼 요새 남자들, 같은 남자 눈에도 너무 좀스러워. 별거 아닌 일에 목숨 걸 듯 화내고”

우연이었을까. 오늘도 버스에서 화내는 남자와 씩씩하게 사과하는 여자를 보았다. 이번 남자는 승객이 아니라 운전기사였다. 60대가 아니라 30대 후반이었고 승객은 20대 후반이었다. 하차 벨을 눌러서 버스를 세웠는데 승객이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안 내려요?” “다음이에요.”

“그럼 말을 해야지요, 에이씨, 눌러 놓고 안 내리면 어떻게 해요?”

버럭 화를 내는 통에 내 비위가 다 뒤틀렸다. 그럴 수도 있지, 안내방송 안 틀어놓은 자기 책임은 없나. 같은 말을 해도 서비스업답게 ‘다음에는 미리 말씀하세요’라고 하면 될 텐데, 공짜로 타는 것도 아니고, 손님 없으면 제 직업도 없어질 것이건만. 그런데 여자 승객은 화끈했다. 군인처럼 씩씩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다음 정류장에서 그이는 마치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는 공수부대원처럼 총알같이 뛰어내리며 화통하게 소리쳤다.

“아저씨,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버스 안에서 웃음이 와하하 터져나왔다. 승객 아줌마들이었다. “아이구, 그 아가씨 되게 씩씩하네.” 웃지 않은 사람은 버스 운전기사뿐이었다.

화낸 남자들은 상대가 같은 남자였어도 똑같이 했을까? 내 친구도 나도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못난 남자들은 밖에서 일이 안 풀리면 집에 와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고 심한 경우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사회의 경쟁이 심화되고 고용이 불안정해지면 남자들은 여자들이 ‘밥그릇’을 위협한다고 흘겨본다. 자신들보다 능력 있는 여자는 ‘독한 여자’ ‘매력 없는 여자’ ‘여자답지 못한 여자’가 된다. 

오늘의 사건까지 전해들은 내 친구는 ‘남자들이 이미 패배했다’고 표현했다. 자기 잘못을 생각해보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화를 낸다는 것은 불안의 증거이며, 불안은 자신감 결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당당히, 확실하게 사과하는 여자들은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남자들이 자신들의 허약함을 낡은 가부장적 습성으로 보상받고자 할 때 여자들은 그 종이호랑이의 위세에 짐짓 눌려주는 척 한다는 것이다. 정말 위세에 눌렸다면 위축되어야 할 게 아니냐는 친구의 반문에 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한탄했다.  

“가부장제는 여자만 억압한 게 아니라, 남자들을 좀팽이로 만들었어. 실력도 없고 자신도 없으면서 남자라는 것으로 다 때우려고 큰소리치는 게 좀팽이지 뭐냐? 여자들은 질경이처럼 딛고 일어서는데.”

가부장제를 그토록 문제 삼았던 것은 남자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평화롭게 상호 발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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