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동급생이 ‘잠정적 연애관계’…무한경쟁이 낳은 강박
우정·사랑 등 다양한 감정적 관계로 서로 지지대 역할해야

몇 주일 전 학내 자치언론 기자라며 1학년 여학생 두 명이 찾아왔다. 이번 호 기획 주제가 ‘연애’라면서, 20여년 전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의 연애와 요즘 대학생들의 연애를 비교 분석하는 내용을 듣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인터뷰를 하기에 매우 적절치 못한 인물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나 좋다는 남자는 내가 싫고, 내가 좋은 남자는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절묘한 어긋남만 반복한 끝에, 꽃 같은 20대 중반에 덜컥, 그것도 부모님 소개로 결혼해 버린 철저한 ‘연애-프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른 결혼은 나에게서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지만, 성과 연애를 개인적 생애과제에서 사회과학적 성찰의 주제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면도 있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사회에 이른바 ‘성담론’이 부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이 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점잖은 여성은 섹슈얼리티와 무관하다는 문화적 금기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점에서 이미 ‘아줌마’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젊은 사회과학도로서 섹슈얼리티와 친밀성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위치를 발견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속칭 명문대의 신입생이 된 새파란 두 젊은이는 학교에 들어와서 “연애 강요하는 사회”를 만났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외롭거나 힘든 마음을 드러내기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연애를 안 해서 그래!”라든가 “소개팅 할래?”라는 권유를 듣게 된단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모든 대학생들은 “잠정적 연애자”로 간주되며, 자발적 연애 단념자는 흔히 “여자이기를, 또는 남자이기를 포기한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된다고 한다. “실업자가 즉시 구직자로 인식되듯이 솔로는 즉시 구애자로 인식”되는 것이 요즘 대학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교지 관악’ p65).

언제부터인지 ‘사귄다’라는 말이 성적 친밀성을 포함한 이성애적 관계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하게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녀 동급생들끼리의 관계조차 처음부터 잠재적 연애관계로 가정된다는 것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몸의 성별이 달라도 사람은 누구나, 뜻이 맞으면 서로 사귈 수 있고 그러한 친교를 통해서 우정이든, (이성애적) 사랑이든, 신뢰든 무엇이든 간에 어떤 종류의 감정적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몸의 성별이 같든 다르든 간에,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떤 종류의 관계로 키워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문제다. 게다가 이제 성인기의 초입에 들어선 축복받은 젊은이들이 아닌가. 무엇이 두려워서 자기들의 관계를 틀 속에 가두어야 할 것인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때’와 ‘요즘 대학생’의 연애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점점 분명해졌다. 속칭 386세대인 우리들은 나름 힘들고 고민도 많았지만 한 가지 축복은 받았던 것 같다. 대학사회 내에 아주 강한 공동체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 간의 관계는 경쟁적이라기보다는 동지적 성격이 강했다. 문제의식은 같은데 방법론이 달랐던 정도랄까.

하지만 오늘의 대학생들은 너무나 파편화, 개인화된 채 학점과 ‘스펙’을 둘러싼 무한 경쟁에 내몰린다. 대입을 위한 점수 경쟁이 치열했지만 그래도 ‘반’이라는 작은 소속감이라도 있었던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대학 입학 후의 학생들은 말 그대로 경쟁의 바다 속에 내던져져 홀로 헤엄치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 선후배 사이에 우정이나 동료애가 미처 자라기도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대학생들은 경쟁이 배제된 관계를 꿈꾸게 되고, 바로 그러한 관계를 이성애적 연애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미 TV와 영화를 통해 ‘달콤한 연애’의 환상을 지겹도록 학습한 상태가 아닌가.

굳이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사람에겐 누구나 일상적으로 만나고 서로 지지하는 관계가 필요한데, 그런 관계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겐 참으로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었으므로 가족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나이가 되었고, 새 가족을 만들 수 있는 단계도 아니고.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왔으므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될 텐데 그럴 수 있는 조건도 아니고, 이리 돌아봐도 경쟁자요 저리 돌아봐도 경쟁자인데 어떤 식으로 관계와 자아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무한 경쟁이 낳은 연애를 향한 강박. 그 강박에 의해 만들어진 ‘연애’ 행위들.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는 그를, 그녀를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젊은이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경쟁해서 우리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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