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을 붙들어라
‘인생 2막’을 붙들어라
  • 오한숙희 / 여성학자
  • 승인 2008.11.28 10:48
  • 수정 2008-11-28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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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는 ‘인생 2막을 여는 방법 찾기’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되 놓치만 않으면 성공
어느 날 낯선 여성으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자신을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40대 초반의 전문직 종사자라고 소개한 후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멀찌감치 날을 하루 잡아놓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지방에서 손님이 오는 바람에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특별한 용건 없이 잊어버릴만 하면 메일을 보냈고 전화를 걸어왔다. 상담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나와 그저 밥 한 끼를 먹고 싶어서일까? 이리저리 찔러보아도 이렇다하게 잡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우리 집주소를 물었다. 과일 한 상자를 보낸다고 했다. 그러고는 드디어 본론을 털어놓았다.

“제가 나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여성운동을 좀 해볼까 해요. 그래서 여성운동 하시는 분과 지금부터 교류를 하면서 좀 배우려고요. 여성단체 같은 곳도 들락거리면서 분위기도 익히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행사나 세미나 같은 게 있으면 저 좀 불러주세요. 시간 만들어서 가 볼게요.”

요즘 40대 여자들의 관심사가 ‘인생 2막’이다. 내 홈페이지에도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는 글이 가끔 올라온다. 여자들의 의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며 살다가 어느 날 40대를 맞은 자신을 갑자기 발견하고 ‘위기의 나이’에 봉착하는 일은 과거 세대의 이야기다. 바야흐로 남편과 아이들, 세상이 여자에게 부여한 ‘여성의 의무’에서 제대하고 자신만을 위해 복무하고자 하는, 또 그럴 수 있다는 것에 약간의 흥분마저 느끼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올해 79세인 우리 어머니는 5년 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인생 2막을 열었다. 평소 말씀이 없고 표현이 없는 어머니가 답답하고 안쓰러워서 말 없이도 자기 표현이 가능한 길을 소개해 드린 것인데 그 길을 가면서 어머니의 삶은 하나둘씩 변해갔다. 가족이 없는 시간을 기다림으로 채우기보다 자신에게 복무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설거지 대신 붓을 빨고, 두부 콩나물 대신 물감과 캔버스를 장보러 나간다. 평생의 관심이 ‘남의 집은 요즘 무슨 반찬 해 먹고 사나’였지만 이제는 ‘저 나무를 어떻게 하면 잘 그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늙은이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손사래 치셨지만 지금은 돈이 생기면 ‘전에 봐둔 그것을 사야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바로 얼마 전에는 거금 70만원, 통장잔고 전액을 찾아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동네 늙은 호박이랑 감나무를 찍느라 안경 속으로 애꾸눈을 만들어 가시는 모습이 재미있다. 약 두 달 전만 해도 ‘내년에 있을 팔순잔치로 마당에서 작은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에 ‘누가 이런 노인네 장난을 보러 오느냐’고 극구 반대하시더니 가을 단풍구경도 마다하고 그림을 그리신다. 입시생처럼 ‘시간이 없다’고 조바심마저 내신다.

어머니는 인생 2막을 열려고 그림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늘 다니던 길 말고 다른 샛길로 잠시 발을 옮겼더니 자꾸 자꾸 길이 이어지면서 어느덧 생각지도 못했던 풍광을 만나게 된 것이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지 말고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것 하나를 우선 붙잡으라. 그것이 2막을 여는 시작이 될 것이다. 그 손을 놓치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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