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누구와 연대하는지에 대한 물음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윤석남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 불리고, 또 그렇게 삶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1993년 자신의 첫 전시회인 ‘어머니의 눈’ 전을 열었을 때 윤석남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회고도 아니고 ‘거듭 확인’의 형태를 띤 자기 주문도 아니다. 이것은 5년 만에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 ‘윤석남-1025: 사람과 사람 없이’의 맥락과 관련해 작가 자신이 던져주는 화두이기도 하다.

나무-개 1025 마리를 전시해 관람객들을 놀라움과 낯선 심미적 경험으로 이끈 이 여성 윤석남에게서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겸손함과 오만을 닮은 담대함은 매우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다.

1025마리의 개를 조형하겠다는 결심을 품은 뒤 5년 내내 은둔자가 되어 나무를 만나고 개를 기억하는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그 힘은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 불림으로써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저는 미래를 믿습니다”라던 1993년 당시의 고백에 이미 정초되어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는 누구의, 혹은 무엇의 미래를 믿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떤 미래를 믿었던 것일까.

그는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미래를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시는 지금도 그 믿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매라고 불리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티스트로서 그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품고 있는 믿음이 페미니스트 아트의 미래 그리고 더 기본적으로는 페미니즘의 미래에 대한 믿음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여성영화제, 여성미술제, 여성주의 잡지 창간, 문화 관련 저서 출판, 인권운동 등에 그가 매번 긴 망설임 없이 단순 명료한 ‘그럽시다’로 관여한 것은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자기믿음과 직관에 힘입은 것이다.

이 자기믿음과 직관을 투명한 자기인식에 도달하게 한 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관과 해석학으로서의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페미니즘이 ‘이런 방식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국내외에서 아트 경매장이 중요한 투자·투기 현장으로(이제 투기와 투자를 구분하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촌뜨기다)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또한 좀 더 독특하고 독점적인 소비 욕망의 충족을 위해 번호 매겨진 사진이나 작가의 사인이 있는 그림이 글로벌 명품과 함께 나란히 고가로 매매되는 시대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제 살을 깎아먹으며 속도전을 치르는 이 신자유주의 경쟁시대에 윤석남의 ‘나무-개’ 작업은 페미니스트 아트에 대한 질문 자체를 새롭게 맥락화한다. 전시장에 들어선 1025 마리의 나무-개들 사이에는 두 여성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컨테이너에 살면서 1000마리가 넘는 버려진 개들을 돌보는 이애신이 있고, 일체의 외부활동을 접은 채 5년 동안 나무에 실린 이야기와 개의 버려진 경험이 ‘행복하게’ 만나도록 쉬지 않고 몸을 ‘쓴’ 윤석남이 있다. 이 두 여성은 쉼 없이 몸을 움직이고 손을 사용하여 밤이면 고단에 지쳐 기침을 쿨럭인다. 이들은 노동자다!

이애신의 ‘동물농장’이 결코 목가적 교훈담이 아니듯이 윤석남의 1025마리 나무-개들은 결코 스펙터클이 될 수 없다. 이들은 하나하나 노동으로 보살펴지고 노동으로 ‘기억’된 것이다. 여기서 윤석남은 생산자로서의 작가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의미했던 것과는 달리 윤석남의 작업은 소비자본주의를 지워나가는 생산이다. 그의 두 손은 일회용 물품과 함께 생명 있는 존재들까지도 손쉽게 ‘쓰레기’로 내다버리는(‘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세워지는 난민수용소가 보여주듯이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소비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소비될 수 없는 것’을 만들고 있다.

페미니즘의 미래, 그리고 페미니스트 아트의 미래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대한 환영(幻影)과 함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은 이 시점에 윤석남의 작업은 페미니스트 아트의 의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떤 형식 원칙과 진리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놀랍도록 단호하고 놀랍도록 부드럽게 질문하고 있다.

“형식 부여를 통해 작품 내부에 간직하게 된 ‘미학적 차원’이 바로 ‘해방적 계기’로서의 예술의 특질”이라는 마르쿠제의 오래된 명제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향해 해방되어야 하는지, 그 해방을 위해 누구와 연대할 것인지-한국 페미니스트 아트의 대모라는 ‘명칭’을 죽도록 싫어하는 윤석남이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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