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 제909조는 친권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해진 친권자가 사망한 경우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판례는 부모 중 다른 일방의 친권이 당연히 부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미성년자인 자녀가 친권자의 사망으로 인해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부모로서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자녀를 학대했던 사람이 친권의 부활로 자녀의 재산관리권을 갖게 되고, 이런 경우 혹 자녀의 복리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포함한 많은 가정문제의 특징은 법 테두리 안에서는 최선의 해결방안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친권은 부모의 권리로 해석해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올바른 법과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세계적인 법 해석의 흐름은 친권을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권이 아니라 부모의 의무로 해석하고 있다.

친권은 본질적으로 권리라기보다는 의무이며, 이러한 의무를 누구에게도 방해당하지 않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고 보아야 한다.

고 최진실씨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남겨진 자녀들과 유족 그리고 고인의 전 남편이자 자녀들의 부친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고인이 남겨 놓은 적지 않은 재산이 어떻게 보면 논란의 핵심일 것이다.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를 잃은 어린 자녀들에게 적어도 성장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의 재산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재산으로 인해 혹 다른 종류의 어떤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특히 이 사건은 많은 한 부모 가정과 그 자녀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주요한 전례가 될 수도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부부가 이혼하면 어느 한 편이 친권과 양육권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친권과 양육권을 갖지 않은 일방이 부모가 아닌 것은 아니다.

자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데 대해서는 부부관계를 떠나서 공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자녀가 성장할 때까지 일정한 양육비를 부담하는 것은 그 의무 가운데 최소한의 것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를 다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또한 가정폭력이나 자녀 학대가 있었을 경우 친권자가 사망했다고 해서 다른 한 편의 살아 있는 친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논점에서 한 가지 기준을 분명하게 세우면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 그것은 오로지 ‘자녀의 복리’다.

생존친의 친권 자동 부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양육이나 재산관리 전반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모든 것을 자녀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보살핌과 배려라는 차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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