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여성 미술가 5명의 '톡톡 토크'
"아직 여성 굴레 못 벗었다" 고백도

 

세대별 여성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순종, 김진숙, 이은실, 하차연 작가. 태이 작가는 사정상 사진촬영이 끝난 후에 합류했다.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세대별 여성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순종, 김진숙, 이은실, 하차연 작가. 태이 작가는 사정상 사진촬영이 끝난 후에 합류했다.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한국,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 미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경기도미술관이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개최하는 여성 작가 기획전 ‘언니가 돌아왔다’에 참가하는 27명의 작가 중 20대에서 50대까지 세대별 작가들과의 만남. ‘여성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성적 환상을 동양화로 표현하는 이은실(25), 프랑스에서 독특한 미디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태이(31), 역시 프랑스에서 ‘비닐봉지 설치작가’로 알려진 하차연(48), 여성성을 주제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 온 이순종(55), 윤석남·김인순과 함께 한국 현대 여성주의 미술을 시작했고 현재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진숙(61) 작가가 그 주인공.

전시 개막을 앞둔 9월 26일, 작업이 한창인 경기도미술관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한국의 여성미술은 1930년대 신여성 나혜석과 1940년대 천경자에서 비롯됐지만 진정한 의미의 여성주의 미술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부터. 특히 1986년 열린 ‘반에서 하나로’전은 ‘페미니즘 미술’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분기점이 된 전시다.

남편의 발을 씻어주는 학사모를 쓴 아내, 술 먹는 남자들을 향해 활을 쏘는 여성 등 당시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이들의 그림은 이 땅의 주부들이 가지고 있던 분노를 토해냈다. 이제는 60대가 된 김진숙 작가도 그때 현장에 있었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이들과 같은 선구자가 있었지만 여성 미술가들은 여전히 미술계에서 소수였다. 이순종 작가의 경우도 미대를 졸업했지만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부모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건너간 미국 생활에서 돌파구를 찾다가 다시 학교에 들어갔고 미술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이순종 작가는 미술을 시작하고 나서도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내가 여자라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불편했어요. 집에서 나갈 때면 꼭 밥을 해놓고 갔고 작업을 하다가도 저녁 시간이 되면 집에 돌아와야 했어요.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건 내 의무고 하지 않으면 나는 나쁜 여자라는 의식이 있었어요.”

일찍이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꾸준히 작업해 온 하차연 작가는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여성, 혹은 청년이란 수식어가 붙은 전시는 일부러라도 피해왔다고. 하지만 이런 그도 “한국에서의 여성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태이 작가도 “페미니즘은 유럽에선 이미 구시대 사조이며 난 단지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뿐”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인 나혜석을 소재로 한 미디어 작품을 선보이는 그는 결국 “여성미술가라고 자신을 카테고리화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여성미술가의 정체성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국화라는 매체에서 성적 환상을 표현한 20대 신인 작가 이은실의 작품은 최근 여성미술의 다양해진 경향을 보여준다. 정작 그는 “예술이라는 건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 매체가 무엇인지는 관계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어느 면에서는 여성운동을 대변하며, 또 한쪽에서는 여성운동의 기운을 힘입어 성장해온 여성 미술가들. 자신을 ‘여성 예술가’로 분류하는 것을 꺼렸지만 계속적인 여성운동에 대한 필요성에 절감했다.

하차연 작가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여성에게 불합리한 구조가 많이 존재한다”며 “예술을 하는 여성들은 거기서 탈피하고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김진숙 작가는 “여성주의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에게 여성운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며 “여성주의 자체가 획일화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도.

이들이 현재 가장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은 미술시장의 상업화다.

하차연 작가는 얼마 전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갔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놀라워했다. 그는 “팔 수 있는 그림만 하려고 하는 현 한국 미술시장의 병폐를 눈으로 확인했다”며 “예전보다 예술가도 많아지고 지원도 늘어나고 지위도 높아졌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이순종 작가는 “외국에선 유명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예술가가 굉장히 배고픈 직업”이라며 “예술가는 항상 무엇인가와 부딪치고 살아야 하는데 조건이 좋아지면 나태해질 것”이라 지적했다. 태이 작가의 경우도 현재 대학 미디어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며 “따로 직업이 없었다면 작품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현재 미술시장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대학의 미술교육이 변화해야 하고 일반인들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한국의 미술교육은 교수들의 확신이 너무 강하고 구체적이에요. 그래서 대학원까지 나오고도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고민에 빠지는 거죠.”(이은실)

“내 분야가 아니라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필요해요. 요즘의 작가들은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길러줘야 합니다.”(김진숙)

“미술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즘 대형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에 다닐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도시만 벗어나면 평생 미술을 접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대다수예요. 곳곳에 다양한 미술관이 유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하차연)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