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레, 세계 베스트 10 가능성 충분”
재일교포 시선 딛고 “예술로 국가에 봉사”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들 사이에서 성장한 발레리나.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에서 지도위원을  거쳐 최연소 단장 겸 예술감독을 지냈고 이후 정동극장장에서 예술경영 CEO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다가 지난 1월 다시 자신의 고향인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온 최태지(49) 단장.

결혼 후에 토슈즈까지 버렸던 그는 체중이 78kg까지 나갔던 몸으로 ‘다시 발레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기를 거쳐 다시 무대를 찾았고, 무대 위에서 그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 ‘발레를 사랑하면 절대 발레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옛 스승의 말을 증명하듯.

재일교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차가운 시선으로 정체성의 고민을 했지만 예술로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최태지 단장의 삶과 예술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에서 정동극장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예전과는 마음가짐이 다를 텐데.

“지금까지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계획적인 성격이 못 되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지내는 스타일인데 발레단 지도위원이나 예술감독, 정동극장장까지 임명을 통해 길이 자연스럽게 열렸어요. 그러나 이번 단장 공모는 제가 처음으로 직접 지원을 했죠. 발레의 대중화나 명품화, 관객 확대도 중요하지만 단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대우나 복지문제까지 신경쓰고 싶었거든요. 단장이 아니라 단원들의 선배로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손들고 하겠다고 한 일이라 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최연소 국립극장 예술감독에 임명됐을 당시 부담감이 컸을 텐데.

“물론이에요. 처음엔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발레리나와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던 곳이라 믿고 따라주는 후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다른 기관이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단장이라기보다는 언니나 누나, 선배의 입장에서 이끌어가는 대로 단원들이 열심히 해주었어요.”

 

-극장장일 때와 예술감독 중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정동극장장 시절 예술가가 어떻게 CEO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화될 때 현장에 있었고 이를 통해 경영에 관해 배운 상태에서 정동극장으로 갔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어요. 극장장 때는 연습실에 한번 못 가보고 사무실에만 있어서 힘들었지만 운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예술인들이 무대 위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발레 대중화의 선두 주자로 알려져 있는데.

“‘해설이 있는 발레’를 통해 발레 대중화에 일조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는 국립이라는 기관의 특성상 수익성뿐 아니라 공익사업에 힘을 쓰고 있어요. 문화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찾아가는 공연이 대표적인데 군부대, 초등학교, 지방 등 발레를 접할 수 없었던 분들에게 우리의 발레를 보여주려 합니다.

가는 곳마다 매진이라 좋았고 더욱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 전 태백에 공연을 다녀왔는데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니는데 속상한 때는 없었는지.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 한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어요.

재일교포도 나름대로 일본에서 차별을 받았는데 한국에 오니 ‘너의 부모님은 한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갔다’는 식의 시각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난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건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심에 빠지기도 했죠.

제 부모님은 아침부터 이미자나 나훈아 음악과 함께 생활하고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오셨기 때문에 나 또한 국가를 위해 봉사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어요. 일본보다 한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길고 한국말이 서툴기는 해도 ‘난 완전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안무가가 있는지.

“현대적인 면을 부각하는 맨발의 발레보다는 토슈즈를 신고 고전적 발레 라인을 유지하면서도 너무 클래식하지 않고 현대적 테크닉이 가미된 작품을 좋아해요. 특히 2000년 공연했던 안무가 존 크리토프 마이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입니다.”

-후배들에게 충고는 어떻게 하는지.

“물론 성에 차지 않을 때도 많지요. 하지만 예술가들은 말 한마디로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다리를 더 많이 올리라거나 라인을 더 살리라고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저는 말은 줄이면서 여러 가지 배역을 주고 경험을 통해 직접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나 자신이 활동했던 곳이라 단원들을 잘 이해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많은 공연을 하고 후배들에게 좋은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죠. 발레리나는 무대가 사람을 만들거든요. 후배들에게도 항상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다가 아니라 무대에서 관객들과 호흡을 나누며 배우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고 얘기해요.”

-무용가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는데 세계 속에서 우리 발레의 위치는.

“한국의 발레 수준이 아직은 미흡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 아쉬워요. 아직 세계 베스트 10은 아니지만 앞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단들이 많지만 사실 3대 클래식 발레를 할 수 있는 발레단은 별로 없어요. 러시아에는 볼쇼이나 키로프 등 5개 정도 되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몇 개 안 되죠.

유럽의 관계자들이 우리 발레단의 클래식 레퍼토리와 기량을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얼마 전 폴란드 공연의 반응에서도 느꼈지만 곧 세계 10위 안에 들 거라고 확신합니다.”

-한국 무용수들만의 내세울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인내력입니다. 외국 무용수들은 물론 인형처럼 예쁘고 표현적인 면도 강하죠. 하지만 인내력이 없음이 느껴져요. 그리고 한국 무용수들은 음악성이 참 뛰어나요. 물론 테크니컬적인 면도 뒤처지지 않죠.”

 

-자녀들이 발레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발레를 한다고 할 때 크게 반대한 사람이 저예요. (그의 큰딸은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에서 활약 중인 최리나씨다) 지금이라도 발레를 그만두고 친구들과 평범하게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무용은 항상 자기 자신을 연마해야 하고 개인적인 시간이 거의 없는 고독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보고 자란 것이 무대여서인지  무대를 선택하더라고요.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 말릴 수는 없지요.”

-국립 발레단의 앞으로의 계획은.

“급선무는 한국형 레퍼토리의 개발입니다. 국립발레단에 취임하자마자 내년의 국가 브랜드 사업으로 우리 발레단만의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공익사업도 계속할 거고요. 또한 새로운 발레 스타 배출에도 힘쓰려 합니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은

1959년 일본 교토 출생. 일본 문화대학을 졸업하고 가이타니 발레단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20대 중반 한국으로 건너왔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와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사상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이 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고 2001년까지 한국 발레의 부흥기를 주도했다. 국립발레단에서 물러난 뒤 2004년 국·공립극장 사상 최초 여성 CEO로 정동극장장에 부임, 3년 6개월간 맡았으며 올해 1월 7년 만에 발레 무대로 컴백했다.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 (재)중구문화재단 이사, 모나코 댄스포럼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