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예산제도는 일반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고려해 예산을 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성폭력에 관한 예산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성폭력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임을 상기할 때 예산 편성단계부터 이미 여성을 위해 만들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폭력 관련 예산도 성별영향평가나 성별분리통계 등 성인지적 분석이 필요한 걸까?

변혜정 서강대 양성평등 성상담실 상담교수는 지난 5일 열린 제4차 성인지 예산포럼(GB포럼)에서 ‘성폭력 관련 공공지출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을 주제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변 교수에 따르면, 성폭력 관련 예산도 성인지 예산제도 도입과 함께 방향 수정이 불가피하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 이래 국가 예산으로 집행되고 있는 성폭력 관련 사업은 주로 성폭력 피해자의 치유와 보호, 예방에 집중됐다.

성폭력상담소를 사회복지시설로 규정해 상담과 법적·의료적 지원을 제공하고, 쉼터 등을 통해 보호하며, 여성긴급전화 ‘1366’을 개설해 신속한 신고체계를 구축했다.

2004년에는 성폭력 피해 아동의 신체적·정신적 피해 치료를 원스톱으로 지원하기 위해 ‘해바라기 아동센터’를 설립했다.

변 교수는 “피해 치료와 보호 중심의 지원체계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이는 제2, 제3의 성폭력 피해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변 교수는 “성폭력 관련 예산을 성인지적으로 집행한다는 것은 지금의 여성 중심의 사후적인 피해자 지원과 치료 수준을 넘어,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한국 사회의 남성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와 교육, 제도의 변화를 위해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최근 노인 여성이나 일반 남성, 트랜스젠더 등 성폭력 피해 계층이 전체 사회적 약자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보다 세심한 정책 수립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이를 위해서는 예산 증액부터 서둘러야 한다. 2007년 여성부와 법무부, 교육과학기술부의 여성폭력 관련 예산은 225억2300만원으로, 전체 예산의 0.014%에 불과하다.

한편 이날 GB포럼에서는 산재보상보험과 건강보험 급여, 장애인 복지, 문화 콘텐츠 전문 인력 양성사업 등 총 5개 공공지출 영역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이 실시됐다.

그 결과 일하다 다친 여성과 남성의 상태가 엇비슷한데도 산재보험 급여나 요양 기간은 여성이 턱없이 짧았다. 의료서비스 이용에서도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욕구가 높은데도 정작 입원 비율은 남성이 훨씬 높았다. 또 장애연금 수혜 성별 격차가 5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자원배분의 규칙들은 상당수 여성의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 일례로 장애연금의 경우 일을 하다 장애를 가진 경우에만 연금을 지급하고 있어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경제활동참여율이 낮은 여성의 경우 접근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석 교수는 이어 “여성에게 배분되는 자원은 여성만이 아니라 해당 여성과 가정을 이루는 남성에게도 같이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는 관점에서 관련 제도를 적극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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