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사회에서 초중량급 역도로 금메달 ‘기적’
‘여자다움’ 집착 버리고 잠재력 찾기 모험 나서야

지난 16일 베이징 올림픽에서 장미란 선수가 여자 초중량급 역도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국내외 언론에서는 지구상에서 제일 힘센 여자의 등장을 보도했다. 금메달뿐 아니라 세 가지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면서 평소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여자 역도라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대회가 있던 날 텔레비전 앞에서 경기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장미란 선수가 그에 앞서 나섰던 십수 명의 다른 선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차분하고 믿음이 가는지를 보았을 것이다.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완전한 균형감각을 유지한 채 깔끔하게 바벨을 들어올렸다.

장미란의 쾌거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져준다.

한국 여성들은 이미 피겨스케이팅, 체조와 같이 가장 ‘여성적’인 스포츠나, 양궁, 탁구, 배드민턴, 핸드볼, 골프처럼 적어도 외모적으로는 ‘여성다움’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병행할 수 있다고 보이는 스포츠에서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드러냈다.

그런데 ‘여성적’인 것과는 정반대로 보이는 종목에서 빛나는 메달을 획득한 장미란. 그동안 그녀가 겪었을 수많은 스토리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여성 선수들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되었다(여성신문 8월22일자). 미디어는 그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을 저버려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날씬하지 않으면 ‘여자답지 못하다’는 여성 억압적 전제를 여과 없이 유통함으로써 외모 산업과 동반적 이해관계를 추구한다고 해서야 어떻게 미디어가 올바른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올림픽 중계에 대해서도 지적할 문제는 많았다. 여성에 대한 편견적 보도, 예를 들어 ‘여자’들은 ‘여자’라고 느낄 때 몸이 위축되고 동작이 작아진다는 등 해설자의 멘트를 들으면서 그 근거는 무엇인지, 그런 것이 통계적 사실이라면 이를 극복할 대책은 진지하게 강구하고 있는지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장미란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잠재력을 일찍부터 발견해서 세계적 선수로 만들어준 부모님께 고맙다.” 장미란 선수의 부모와 같은 부모가 많아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녀의 경기를 알리고 해설하는 아나운서와 전문가, 기자들이 그 ‘여자’의 몸무게, 여자로서 가지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얻은 것에 대해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자답지 못한’ 여자의 성공을 지원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몸무게를 키우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는 역도와 같은 유형의 스포츠는 현 상황에서 여자 선수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이런 사회에서 세계 최강 선수가 된다는 것은 정말 인간으로서 도달하기 어려운 기적적인 일이 아닐까. 깊은 성찰과 인내심을 갖고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장미란 선수가 이르렀다고 보인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 지독한 ‘여자다움’의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여자다움’을 그 편협한 울타리에 가두고 작은 저울에 달아 놓지 말고 해방시켜야 한다. ‘여자’라면 사회가 변덕스럽게 요구하는 외모를 가꾸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여자라도 잠재력을 찾기 위해 ‘여자’임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에 용감히 도전할 자유가 있음을 장미란 선수는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무엇 무엇을 하는 것이 어렵다, 여자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라는 ‘나쁜 신념’을 버리고 스스로를 초월해낸 장미란 선수는 수많은 후배들, 좌절의 기로에 있는 많은 여자들에게 힘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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