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아동에 “성폭행 상황 재연하라”
성폭력 피해보다 더 잔인한 경찰수사

지난 2002년 11월 당시 만 5세였던 손가희(가명)양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약 4개월간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가희양의 어머니는 2003년 9월 가해자를 형사고소 했다. 하지만 경찰의 조사는 성폭력 피해보다 더 잔인했다.

경찰은 만 6세 가희양에게 옷을 벗고 성폭력 당시 상황을 재연할 것과 가해자의 성기를 그릴 것을 요구했다.

아이가 못 그리겠다고 하자 “봤으면 왜 못 그리느냐,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쳤고 심지어 “엄마와 가해자의 성기가 어떻게 달랐는지 말하라”고 추궁했다.

결국 담당검사는 “엄마가 아이에게 포르노 테이프를 보여주고 교육을 시킨 것 같아서 믿을 수 없다”며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다.

가희양은 조사 후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로 3년간 집중적인 정신치료를 받아야 했다. 가희양의 어머니는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내봤지만 법원은 “수사과정상 불가피한 것이었다”며 기각했다.

최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직접적인 1차 가해보다 경·검찰 등 수사기관에서의 2차 가해행위가 더 심각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수사관행’을 이유로 행해지는 2차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고소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가희양처럼 국가상대 손배소를 내도 2차 가해행위를 입증 받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최영희 통합민주당 의원과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이미경)는 지난 11일 ‘아동청소년 성폭력 2차 피해, 국가 책임을 묻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해법 찾기에 나섰다. 이미경 소장은 “현재의 수사·공판 체계가 철저히 성인 위주의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진행되다 보니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기존의 성인·남성 중심적 수사관행을 대체할 수사기법을 연구·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앞서 2006년 ‘성폭력범죄 피해자 조사지침’을 마련했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에 대한 호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가희양의 어머니는 “뻔뻔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가해자도 공포스러웠지만, 부적절한 질문으로 아이가 어린 나이에 자살까지 생각하도록 만든 경찰들의 2차 가해행위가 더 끔찍했다”며 “아동의 심리와 성폭력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가 수사를 전담하는 등 성폭력 사건 전담 기관청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희양 사건을 포함해 총 6건의 아동 성폭력 2차 피해 기획소송을 담당한 조인섭 변호사(C&C법률사무소)는 “2차 피해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은 2차 피해 문제가 국가의 법적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사전적 예방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지난 2003년 경찰의 실수로 불필요한 녹화 진술을 여러 차례 반복한 사건과, 2004년 밀양에서 집단 성폭력을 당한 여중생에게 경찰들이 ‘너희들이 밀양 물 다 흐려놨다’는 식의 모욕적 발언을 하고 가해자와 직접 대면하게 한 채 가해자를 가려내게 한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 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조 변호사는 “제기한 소송 건수에 비해서는 미약하지만 최근의 승소 판결들은 행정규칙에 불과했던 각종 피해자 보호규정에 대해 수사기관의 직무상 의무를 넓게 규정하고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근거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대법원 판례 바꾸기 운동’의 일환으로 국가상대 손해배상소송 판례를 대법원 대법관을 비롯해 전국의 법관, 검사, 경찰들에게 발송키로 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