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방지책임 물어 더 엄격히 처벌해야”
성희롱 면죄부 준 고등법원 판결 뒤집어

직장 내 성희롱을 방지해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성희롱을 했다면 해고 사유가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직장문화 탓으로 돌리거나 술에 취해서, 우발적으로 했다는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지난 14일 “해고는 가혹하다”며 대기업 S카드 지점장 정모(47)씨가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 청구소송에서 정씨의 손을 들어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문제가 있다며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2002년 7월부터 2003년 7월 11일까지 8명의 여직원을 상대로 14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성희롱을 했다. 뒤에서 껴안거나 지점장실로 불러 목과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요구하고, 심야에 수차례 전화를 걸어 “사랑해. 집이 비었는데 놀러와”라고 말했다. 여직원의 실적이 좋을 때는 “열심히 했어. 뽀뽀”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전국 지점 종합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뒤 가진 회식 자리에서는 자신이 한 입 베어 먹은 상추쌈을 다른 여직원에게 먹였고, 축하한다며 여직원들을 일일이 안아 들어 올렸으며, 귀에 입을 맞추거나 엉덩이를 치기도 했다.

결국 여직원들이 회사에 징계를 요구했고, 회사는 인사규정상 해직 요건인 ‘고의성이 현저한 경우’에 해당한다며 2003년 9월 정씨를 해고했다. 그러나 정씨는 이에 불복해 중노위에 재심을 요청했고, 복직했다. 하지만 또 다른 여직원을 성희롱한 사실이 밝혀지고 해고 당시 성희롱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여직원들을 찾아가 회유한 점이 드러나 다시 해고됐다.

이번에는 중노위도 해고를 인정했다. 그러자 정씨는 곧바로 법정투쟁에 나섰고,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성희롱은 인정되지만 해고는 지나치다는 것이다.

서울고법 특별5부(부장판사 조용호)는 지난해 10월 “정씨의 행동은 성희롱으로 인정되며 중징계가 불가피하다”면서도 “일부 여직원은 격려로 받아들일 정도로 행위가 중대하다고 보이지 않고, 흥분한 상태에서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행동한 점을 고려할 때 ‘고의성이 짙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성희롱 행위를 인정하고도 애정 표시라며 면죄부를 준 것이다. 당시 여성계는 “기업에 성희롱을 중징계하지 말라는 것 아니냐”며 거세게 반발했다.

다행히도 대법원은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직장 내 성희롱을 방지해야 할 지위에 있는 자가 성희롱을 한다면 피해자는 불이익이 두려워 성희롱을 감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2심은 지점장 정씨가 왜곡된 직장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평소 생활태도에 따라 별 문제의식 없이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지나치다고 판단했지만, 엄연히 1999년부터 직장 내 성희롱 금지 규정을 포함한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 중이고 14차례에 걸쳐 반복하는 등 회사 규정상 해고 사유인 고의성이 뚜렷하므로 2심 판결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정씨에 대한 해고가 정당하다’는 최종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성희롱 판결 관행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다.

일례로 대법원은 지난해 6월 회식 자리에서 여교사에게 술 따르기를 권유한 초등학교 교감의 행위는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반대로 서울고법도 지난해 11월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에게 이른바 ‘러브샷’을 강요하고 목에 키스를 하려 한 외국계 회사 차모 팀장에 대해 “피해 여직원과 직위가 같아 고용상의 불이익을 준 것은 아니지만 회사로부터 성희롱으로 한 차례 경고를 받고도 또 다시 회식 자리에서 노골적인 성적언행을 계속한 것은 징계해고 사유가 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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