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디지털 문명이 낳은 새로운 권력층
자유롭게 이동하는 이들의 특성 파악해야

촛불을 비켜갈 도리가 없다. 촛불에 관한 것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부차적으로 느껴지는 시절을 살고 있다.

촛불은 말(言)이다. 수만, 수십만의 군중 하나하나가 다 말하는 입으로 보인다. 괴담도 존재하고 객설도 흘러 다니지만 탁견이라고 느껴지는 주장도 많다. 기억나는 것을 떠올려 본다.

먼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운명적으로 하락하게 되어 있다는 어떤 정치분석가의 진단. 지난 대선 결과는 국민 대 후보자 간에 일종의 거래관계를 맺은 투표였다는 것이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약속이 그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잘 사는 경제성장은 후진국 박정희 시절에나 가능한 지표였다. 지금은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가 꼼꼼히 따져진다. 유류가 폭등이 아니었어도 민심이반과 지지율 하락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건강에 대한 국민의 기대수준이 이렇게 높을 줄 몰랐다는 대통령의 언급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광우병 불안이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대통령의 통치방식이 1970~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도 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상의 무리는 양해될 거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 쇠고기 협상이다. 개발독재 시대에 바로 그 같은 결과론이 국가운영을 지배했다. 그런데 과연 지금 납득되지 않는 정책을 나라님의 명이라고 따를 국민이 얼마나 될까.

후보자 시절 정치인 이명박은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우리가 땀 흘려 일할 때 빈둥빈둥 놀던 자들이 운동권이다”라고. 지금 촛불을 든 사람들의 다수가 바로 그 빈둥빈둥의 자녀들이다. 정치를 몰랐다는 대통령의 토로는 정직한 말로 들린다. 열심히 일했는지는 모르지만 가치의 문제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문제 진단은 많고도 많건만 해법은 무얼까. 이명박 대통령에게 탈출구는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도 총리를 바꿀까, 대통령 실장을 바꿀까, 내각과 수석 가운데 몇 명을 교체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말짱 헛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지금 국민 분노의 모든 원인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 밑의 누구를 교체한다고 해서 수그러들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이명박 out'이 시위대 구호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며 여야 연립정부 구성이 제안된 바 있다. 한나라당의 거부로 무산됐지만 고려해 볼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 측에서 책임총리가 나와 내정을 담당하고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에 전념하는 방안이다. 민주당의 낮은 지지율로 봐서 효력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최악의 파국은 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촛불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이념집단도 정치집단도 아니다. 친북좌파의 사주를 받아 시위를 벌인다는 유치한 보고에 휘둘린다면 사태는 갈수록 악화된다. 촛불들은 디지털 문명이 낳은 새로운 권력층이다.

정보학자 마뉴엘 카스텔의 네트워크 개념을 따르자면 새로운 권력은 장소에 있지 않고 흐름에 있다고 한다. 자유롭게 이동하는 새로운 권력의 흐름. 집권세력은 바로 이 흐름을 탈 수 있어야 존립이 가능하다.

곰곰 생각해 보라. 촛불의 흐름 속에 집권욕에 불타는 정치집단이 존재하는가. 촛불 속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다고 보는가. 지금 등 돌린 촛불들은 언제든 지지자로 되돌아 올 수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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