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정원의 철학’ 윤혜린 교수
‘베란다 정원의 철학’ 윤혜린 교수
  • 이은경 / 여성신문 기자·20주년 기념사업본부장
  • 승인 2008.05.30 11:06
  • 수정 2008-05-30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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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베란다에 가꾼 100여개 화분 소재
식물 매개체로 일상의 문제 철학 담아

셀프 리더십에는 이 감정의 배설물조차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훈련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소위 정서적 노동이라 불린 감정 정리는 그간 힘없는 자들이 전담해왔다. (중략) 식물은 윗식물 아랫식물 할 것 없이 배설물이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방식대로 영양을 섭취하고 몸 안에서 에너지를 순환시키는데 그런데도 찌꺼기로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다, 다들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다.

-‘베란다 정원의 철학’ 중 ‘셀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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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동무가 되어준 베란다의 올망졸망한 화분들과 함께한 윤혜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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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이자 연구원 2대 농부”라고 소개한 윤혜린씨. ‘탈식민 관점에서 아시아 여성학 정립’ ‘지구화와 젠더’ 프로젝트 등을 수행한 여성 철학자가 “보살핌, 생명감수성, 상생과 모성 등 여성 철학적 가치의 동심원적 확장을 바라며” 생활 속 철학 에세이 ‘베란다 정원의 철학’(이화여대 출판부)을 출간해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책은 위계질서 속에 약자가 감당해야 하는 정서노동, 개체로서 나와 다른 생명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이름’의 가치, 이주의 전 지구화, 사랑의 편파성에 대한 딜레마 등 일상에서 부딪치는 여러 문제들을 식물을 매개체로 한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삶의 언어로 풀어낸다. 저자 자신이 10여 년간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 올망졸망한 화분 100여 개를 가꾸며, 심지어 자신의 컴퓨터 책상까지 식물들에게 내준 진짜배기 농사꾼이다. 육십이 다 된 연구원의 청소 도우미 아줌마는 그에게 영농 자문 역이자 1대 농부다. 그는 책 출간 후 1대 농부의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몰랐다”는 반응을 접하며 새삼 체험에서 나온 공감의 철학적 기쁨을 맛봤다.

“10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왔을 때 8층에 사는 게 참 어지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20층이나 30층에 사는 얘네들(식물들)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을 정말 돕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책엔 ‘얘네들’을 대화 동무로 한 성찰을 담아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키우는 것은 시간을 건너뛸 수 없는 24시간 노동이란 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생명감수성과 보살핌의 가치를 생각했고, 이것이 없다면 여성주의의 가치도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백문(百聞)이 불여일행(一行)”임을 강조하며 생명감수성 충만한 공동체를 위해 모두 “내 나무 하나 갖기”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그 아이가 꽃을 피울 때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는 시간과의 싸움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모성과 연결시켜 “모성이 빈 둥지로 남으면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내가 애를 키우는 것 같지만 애가 나를 키운다”는 엄마들의 일상 고백이 가능한 동전의 양면 같은 현실을 식물 키우기를 통해 체감해 간다. 때문에 “생명감수성이 내 집 담 밖을 넘길”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마음이 인터뷰 내내 감지됐다. 

“경쟁력 강한 사회에선 우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경쟁사회의 룰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또 가르쳐야 한다. 햇빛 다툼이 엄청난 식물들도 협력과 경쟁으로 함께 가며 변화의 기쁨을 맛보듯. 여기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닌 낙관성, 즉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될거야’란 믿음을 취대한 발휘한다면 경쟁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천하 만물에 다 철학이 스며들어 있음을,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스며들어 있음을 느끼며 철학의 문턱이 한결 낮아짐을 느낀다. 저자가 평생교육원에서 중장년 여성들에게 철학적 글쓰기를 지도하는 인기 강사로 10여 년간 활동하며 상아탑을 넘어 또 다른 세계와 교우한 결과다. 그 자신 “늦깎이 철학도들인 이 분들께 역할모델이 되었으면”이라는 소망 속에서 책 집필을 시작했고, 이어서 “사람들의 일상 세계에서 움터 나올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구성”하고자 했다.

“우린 에스컬레이터 타듯 대학에 들어왔다. 반면 4050세대가 돼서 논술과 철학을 접하는 여성들에게 철학은 20대의 ‘관념’이 아니라 삶의 푯대이며 자기의 생각이고 정신의 주인이다. 이런 이들에게 철학으로 가는 징검다리 하나를 놓아주고 싶었다.”

책은 철학 전공자들의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고자 한 시도의 결과물인 셈이다.

“대화하게 하는 힘이 바로 철학”이란 신념을 가진 저자는 책 말미에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화’를 건넨다.

“자신과의 대화는 성찰이 되고, 타인과의 대화는 토론이 되고, 이방인과의 대화는 소통 수단이 됩니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절대 희망의 메시지에 왜 ‘사과나무’가 상징적 존재로 등장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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