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러시아정교회·사회주의 복합체 등
천년 역사 문화적 저력과 유산 풍성
모스크바는 옛 소련의 웅장하나 경직된 흔적이 남아 있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옛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적 저력이 느껴지는 곳이다. 상당히 비싼 꽃값에도 불구하고 꽃 선물을 즐겨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어디나 꽃집이 눈에 띄고, 주말엔 시내 명소 여기저기에 화려하게 장식된 리무진을 대기시켜 놓고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어울려 샴페인을 마시며 여흥을 즐긴다. 개인주의를 억제한 사회주의가 아무리 위세를 떨쳤더라도 인간의 본성, 특히 이 낭만적인 국민성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모스크바 하면 떠오르는 붉은광장과 성바실리 사원. ‘붉은’이란 말 자체가 한국에선 공산당을 연상케 하지만 기실 붉은광장의 ‘붉은’은 공산주의와 그다지 관련이 없다.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 광장’으로 불려왔는데, ‘크라스나야’에 ‘붉은’이란 뜻이 있다. 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에 자리 잡고 시장으로 사용되다가 후에 차르의 선언이나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붉은광장에선 현재는 메이데위 등의 시위행사나 사열식이 진행된다.
다갈색의 포석이 인상적인 붉은광장의 너비는 100m, 길이는 500m 정도로 남동쪽엔 양파 모양 지붕에 가지각색 여덟 개의 탑으로 현실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성바실리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맞은편 북서단엔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국립 역사박물관, 크렘린 쪽에 맞닿아 있는 부분엔 피라미드 공법의 화강암 건축물 안에 레닌이 생전 모습 그대로 누워 있는 레닌 묘, 광장 동쪽엔 옛 소련 시절 유리 지붕을 얹어 지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최대·최고의 굼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다.
12세기 모스크바 공국을 세운 유리 돌고루키 공이 목책으로 세운 요새에서 비롯된 크렘린 궁전(크렘린은 일반명사로 ‘성채’ 혹은 ‘성벽’을 의미)은 현재는 20개의 성문을 갖춘 삼각형 성벽 안에 궁전과 사원, 탑,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한 관청, 레닌 정원 등 많은 건축물로 이뤄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됐던 우스펜스키 성당, 황실 무덤이 있는 아르헹겔리스키 성당, 황실 예배당이었던 블라고베르첸스키 사원 등 러시아 정교회 사원들이다. 크렘린 궁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이반 대제의 종루엔 무게가 210톤이나 나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황제의 종’이 있다. 종에 손을 대고 마음 속 소원을 기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동서고금 공통된 속설 덕분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무대가 됐다는 노보데비치 호수 옆 수도원은 전쟁 중 요새의 역할을 했는가 하면 차르 일족이나 명문 귀족 자제들이 은둔 혹은 유폐당하기도 했다. 부속 묘지엔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옐친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옛 소련의 파워를 상징하는 곳 중 한 곳으로 시내 곳곳의 지하철 역사를 들 수 있다. 70여 년 전 사회주의의 절대적 권력 아래 건설된 지하철 역사들은 ‘지하 속 미술관’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작품과 화려한 장식들로 치장돼 있다. 최고 깊이 지하 150m까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노라면 곧장 수직 하강할 것 같은 위태위태한 기분이 든다.
이은경 / 여성신문 기자·20주년 기념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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