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장학지도권 폐지의 ‘반가움’ 불구
사교육기관 강사의 학교 강의 참가 등은
공적권리나 책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

대선과 총선이 끝나고 이제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하나의 전혀 새로운 국면, 즉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구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교육체제 속으로 진입하는 형세를 맞고 있다. 바야흐로 ‘자율화 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15일자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이제 다양하고 질 높은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단위 학교와 지방 정부에 자율권을 부여하겠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 자율화 방침을 저해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각종 규제가 조만간 대폭 철폐될 것으로 보인다.

그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육과정 운영이나 교수학습 방법 등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한 지시·감독의 근거가 되었던 ‘포괄적 장학지도권’(초·중등교육법 제7조)의 폐지이다. 이에 따라 학교는 앞으로 자율권을 강화시켜 학사를 스스로 결정·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평준화 제도 하에서 운영되어 왔던 표준화된 교육과정이 일선 학교의 교육 틀을 답답하고 획일적인 형태로 규정해 왔음을 생각해볼 때 이런 조치는 일견 반길 만하다. 하지만 이 ‘반가움’은 이 자유화 조치의 전체적 성격과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곧장 ‘반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한층 강화될 것이 분명한 입시경쟁체제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이 ‘자유’가 올바로 쓰일 여지는 아주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학교들은 이 자유를 정당한 교육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입시의 광기를 부추기는 데 사용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제 0교시 수업은 물론 우열반 편성과 보충수업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방과 후에는 영리단체 학원 강사들도 학교 교실에 들어와서 가르칠 수 있도록 했다 하고, 또 학생들은 사설기관 시행 모의고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니, 그게 그런 게 아닌가?

사교육기관 강사의 학교 강의 참여는 학교가 사교육의 기회를 자체적으로 소화해내기 위한 방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학교 교육의 중심축은 그리로 이동할 것이 뻔한데, 이게 바로 정부와 학교가 공적 권리와 책임을 스스로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학원과 학교의 ‘적극적’ 동반자 관계라! 학교 안팎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학원가만 살판났다. 아예 교장직을 사교육기관에 넘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우스운 꼬락서니요, 개탄할 일이다.

이렇게 보니 정부가 말하는 다양성과 질 높은 교육이라는 게 무언지 확연히 드러난다. 요컨대 수월성이요, 지적 경쟁력이다. 세계화된 상황에서 그건 최우선 목표가 아니겠느냐고 주장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어디 제대로 된 경쟁력인가? 왜냐 하면 이런 식으로라면 아이들은 ‘다시 한번’ 점수 따는 기계로 철저히 조작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북유럽 국가 중 하나인 핀란드의 교육을 일견해보자. OECD 국가 국제성취도 비교에서 한국 학생들은 점수로 보면 최상위권이지만 학습동기에 있어서는 밑바닥이다. 이에 비해 핀란드 학생들은 학습동기도 최고이고 학업성취도도 최고 수준이다.

핀란드에서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는 지적 수월성을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뒤처지는 아이들을 함께 보듬어 안고 갈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참된 인간을 길러낼 수 있는지 하는 것이라 한다. 요컨대 이곳의 교육은 내적으로 동기화되어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현 정부가 말하는 다양성과 자율성으로 우리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이렇게 진정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을지 곰곰 생각해본다.

지금까지의 교육이 노예적 정신을 가진 매우 의존적 인간들을, 따라서 자기 수족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따라서 창조적이지 못하고 모방에만 익숙한 원숭이와 무감각한 돌덩어리 같은 인간을 양산해 왔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분들이 계신가?

또 이기적 욕망으로 철두철미 관철되어 있고, 따라서 타자에게 적대적이며, 현실주의적-경제적 가치 차원에 매몰되어 인간적 삶의 깊이와 정신의 그 빛나는 면면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양산해 왔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분들이 계신가? 여기 우리 주변에 까맣게 타버린 숯덩이 같은 아이들이 숱하게 널려 있다.

나는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교를 요청한다. 스스로 창조적 사유의 세계에서 거닐고, 내적으로 동기화되어 있는 참된 학문에 힘쓰는 학교. 몸으로 살 줄 알고 그런 점에서 단순한 실용이 아니라 생활의 의미를 알고, 타자와 공존하며 따라서 학우를 적절히 배려할 줄 알고, 양심의 소리에 이끌리며 그런 점에서 책임적이며, 양심의 소리에 이끌려 책임적으로 사는… 내적-정신적 가치를 사랑하는 그런 인간을 위한 학교 말이다.

나는 현 정부가 그간 존속해 왔던 평준화 체제에 반영된 국가의 공적 책임에 관한 철학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을 요청한다. 단위 학교에 자유를 위한 변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사회 상층부에게 대폭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주는 대신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권을 제한하고, 입시교육을 위한 ‘자유의 행사’라는 왜곡된 상황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모두를 위한, 자유로운 인간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일본 문부성이 최근 추진하는 교육개혁을 살펴보던 중, 그 대강은 우리의 것과 흡사하나 한 가지 우리와 다른 매우 흥미로운 논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음이 풍부한 사람 만들기”라는 대전제와 또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 “스스로 여유 있게 배우고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힘 기르기”라는 첫번째 목표였다.

일찍이 우리네 선인들도 서당과 서원에서 그런 여유 있는 학습법을 사용했다. 그분들이 그렇게 높은 학문과 삶의 경지를 개척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공부법 덕분이다. 오늘날 그 흡사한 형태가 유럽 대륙의 저 오래된 공부법에도 존재한다.

당신들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금 내놓은 0교시 수업, 우열반 편성, 보충수업금지 조항 폐지, 사설기관 학교 출입 등 기상천외한 방안들은 이 풍부한 마음으로 하는 여유 있는 학습법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식의 발상을 고집하는 한, 당신들의 의도가 곧바로 허구로 입증될 것임을 왜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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