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 전쟁…통·번역이 무기
입회기준 엄격…올바른 번역 앞장

 

“현재 세계는 문화 콘텐츠 전쟁에 접어들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통·번역이 한국에 대한 세계의 평가를 결정합니다. 협회를 통해 개인적인 직업으로만 생각해왔던 통·번역을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통·번역 업계를 이끌어온 동시통역사 1세대인 김지명 컨벡스코리아 대표가 지난달 21일 출범한 한국통번역사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국외국어대에 통번역대학원이 생긴 것이 1981년, 30여년의 역사를 가진 통·번역사들의 단체가 이제야 생긴 것이 의아했다.

“통·번역사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데 모이기가 쉽지 않았죠. 인력이 귀해 대접받으며 일했던 우리 세대와 달리 젊은 통·번역사들은 경쟁이 치열해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거나 일을 찾지 못하는 후배들도 많죠.”

그는 “개인 프리랜서로 일하니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기 때문에 협회라는 울타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동안 못했던 선배 노릇을 할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현재 협회에는 100여명의 동시통역사들이 가입돼 있다. 팀으로 일하는 통역사들과 달리 번역가들은 개인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가입 권유가 쉽지 않지만 점차 회원을 늘려나가고 있다.

입회 기준도 엄격하다. 전문 통·번역가로 3년 이상 활동한 경력이 있어야 하고, 회원 3명 이상의 추천을 거쳐야 한다. 업계를 가장 잘 아는 동료들끼리의 검증 과정이다.

그는 협회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로 ‘번역 실명제’를 꼽았다.

“최근 표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표절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바로 오역입니다. 그 이면에는 정직하지 못한 풍토가 깔려 있죠. 일하는 사람의 정직뿐만 아니라 쓰는 사람을 제대로 밝혀주는 것도 정직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의 크레딧을 밝혀 제대로 대접해주고 오역자는 역사에 남기자는 것”이라며 통역과 번역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작업부터 시작하겠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통·번역사에 대한 급여 수준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윤리규정과 작업조건을 정하며, 검증된 인력풀을 제대로 관리하는 일도 협회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의 경우에는 동시통역 부스의 크기, 환기시설, 물과 커피의 제공, 휴식시간 등 세세한 것까지 정해져 있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직업인 만큼 복지문제에 신경을 써 전문 직업인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개개인이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는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적 자료들을 제대로 번역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문화재에 적힌 영어 설명을 보면 재미도 없고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많아요. 번역이란 단순히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변역 과정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죠. 제대로 된 영어실력을 갖춘 문화해설사 양성도 시급하구요. ‘히스토리는 스토리’라고 하잖아요.”

그 외에도 논문 등 학술번역과 특허 등 기술번역을 바로잡고 국제적 행사를 유치하려는 지자체를 지원하는 등 협회가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고 말했다.

통·번역 업계는 ‘90% 이상이 여성’이라고 할 정도로 특히 여성이 많은 분야로 알려져 있다. 김 회장은 “시간 활용이 자유로운 통·번역사는 여성들에게 평생직업이 될 수 있다”며 통·번역사의 매력을 얘기했다. 또한 자신이 하기 나름으로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추천했다.

통·번역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그는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전문분야를 키우라”고 조언한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콘텐츠가 없이 영어만 잘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언어실력만을 키우려는 최근의 영어교육에도 우려를 표했다.

국제회의 전문기획사인 컨벡스코리아를 이끌고 있는 김지명 회장은 지금까지 2000여회의 국제행사 통·번역을 맡아온 업계의 맏언니다. 서울올림픽 기념 학술회의,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1~5차 APEC 정상회담, 1차 ASEM 회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중요 행사의 동시통역 책임을 도맡아왔다.

그는 또한 해외유학이나 체류 경험 없이 외국어전문가가 된 ‘토종 영어 고수’로도 유명하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일하다가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 1기로 입학해 동시통역가가 됐다. 1989년 컨벤션 사업에 뛰어들어 컨벡스코리아를 세우고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제20회 세계박물관대회, 아·태 해양장관회의 등 수십개의 국제행사를 진행해왔다. 2005년 대한민국 컨벤션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신우재 경원대 겸임교수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고 있다.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번역가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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