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목의 온기가 사회 전체로 퍼지도록
사회적 약자 중심에 두는 정당 있어야

‘새로운 진보’, ‘생활 진보’, ‘실용 진보’, ‘푸른 진보’… 17대 대선이 끝나고 18대 총선이 다가오면서 각종 수식어를 단 ‘진보’ 논란이 뜨겁다. 논란의 이면에는 보수정당임을 자임하는 한나라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가 던진 충격과, 유권자들에게 외면을 받은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와 결별하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주체의 욕구가 놓여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유권자들의 평가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정당하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런데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쏟아지는 ‘△△진보’ 속에서 진보인 것과 아닌 것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의문이 들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진보’ ‘진보정당’을 말할 때에는 세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우리 사회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보수, 보수정당이 아닌 어떤 것의 다소 모호하고 포괄적인 의미다.  더 구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아닌 어떤 것들을 통칭했다.

다른 하나의 의미는 ‘제3의 길’ ‘사민주의’ ‘사회주의’ 등 진보가 지향하는 이념을 기준으로 구분할 때 사용된다. 보수가 시장자유주의를 신념으로 한다고 할 때 시장자유주의에 대칭되는 다른 이념을 가진 정당을 진보라 칭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표하고자 하는 지지기반의 차이를 나타낼 때이다.

‘중산층-서민의 정당’ ‘노동자 정당’ 등의 표방은 지지 호소 대상을 대기업, 고소득층,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득층과 구별함으로써 정당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쓰인다.

이 세가지 의미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첫번째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정치세력을 지칭한다면, 두번째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새롭게 조직할 비전이다. 세번째는 새로운 질서를 추동할 중심 사회집단이자 그 정당의 노선과 활동에 준거점을 제시해줄 사회집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진보’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은 역시 세번째 수준의 문제다. 이념은 역사적 시기와 정치환경의 변화에 적응해 변화하며, 정치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이때 기준점을 제공하는 것이 구체적 시기에 존재하는 사회집단들 가운데 ‘누구’를 대표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역사적으로 진보정당은 해당 사회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이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며, 이들을 조직하는 것을 정치활동의 중심에 두어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시장 인력의 50%를 상회하는 비정규직, 급격한 고령화 속에서 자기부양 능력이 없는 고령층, 국가의 재정지원이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극빈층 및 도시노동자 평균임금에 못미치는 노동빈곤층 등이 사회적 약자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이견은 없다. 그렇다면 그 정당이 진보정당이냐 아니냐의 판단기준은 그 정당이 어떤 이념을 내걸든, 어떤 레토릭(rhetoric·수사·修辭)과 이미지로 포장을 하든간에 명백히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 집단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정책과 활동에 초점을 두느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진보정당은 미래의 불확실한 소득에 대한 기대를 담보로 성장 중심 노선을 취하기보다 당장의 소득 재분배를 위한 구조에 더 관심을 갖는다. ‘경기가 활성화될 때까지, 국민소득이 몇만달러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이란 가정법은 진보의 논리가 아니다. ‘윗목의 온기가 아랫목에 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 사회의 자살률은 몇년째 OECD 국가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최저 출산율을 자랑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압도적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부모 소득이 낮을수록 그 자녀가 미래 비정규직 노동자 및 실업자가 될 확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윗목의 온기는 그저 기다리면 아랫목으로 옮겨오지 않는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나서 윗목의 온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노력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비록 어설프고 무능하고 못나서 번번이 실망을 안겨주지만,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의 이해를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행동하려는 정당을 여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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