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더불어 지역화도 동시에 진행 추세
모국어에 대한 관심 사회공동체 공부 위기

새 정부가 교육에서 주안점으로 삼겠다고 내놓은 5가지 정도의 방안을 보면 자유경쟁체제, 학력주의, 효율성, 경제적 세계화에 부합하는 실용적 가치의 문제 등이 전면에 포진되어 있다. 반면,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나라를 병들게 했던 학벌주의나 고통과 죽음에 신음하는 등 불행에 빠진 우리들의 어린이와 청소년들, 그리고 이로 인해 흡사 어떤 정신병적 공황상태에 빠져든 우리 사회에 대한 고심의 흔적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인수위는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근간을 흔들 만한 굵직굵직한 정책을 내놓고, 이런 것들이 향후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는 식으로 나가고 있다. 또 그런 식으로 내놓은 정책이라는 것도 여론을 보아가며 슬쩍슬쩍 바꾸기 일쑤이다. 국민에게 자율과 자유를 주겠다고 하면서 정작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기본 경로는 독점하고 있는 형색이다.

교육은 기업이나 정치처럼 그 결과를 단기간에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정책 하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논의가 필요하고, 또 이를 수행하는 현장에서의 폭넓은 공감대를 전제로 한다. 교육은 정부가 내놓은 무슨 기발한 정책 몇개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인수위가 내놓은 ‘영어 공교육 완성프로젝트’에 따르면 영어는 초·중등교육 단계에서 대폭 강화될 형국이다. 실용영어 구사능력에 중점을 두고, 시수도 늘이고 영어시간은 ‘몰입교육’ 방식으로 한다고 한다. 그 논거는 세계화 시대 의사소통 능력의 강화라 한다.

세계적 추세로 보아 영어교육의 필요성이 이전보다 더 분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는 너무 과장되어 제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세계화와 더불어 동시에 ‘지역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문제를 놓고 한번 생각해보자. 여러 문화권과 지역에서는 지배적인 언어로 인해 자체 언어가 사멸되지 않도록 제 각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예컨대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영어교육을 강화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음은 사실이나 모국어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사는 약화되지 않았으며, 또 전통적으로 제2, 제3 외국어를 중시해왔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모국어 교육이나 제2 외국어 교육은 이들 국가에 비해 비중이 약하며 그 구사 능력 또한 뒤처진다. 이걸 어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예컨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문화권 사람들과 일단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겠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이런 영어 능력은 무의미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좀더 본격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요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해당 지역어이거나 그 지역이 속해 있는 문화권의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에서조차 히스패닉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다. 중남미권에서 영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 영어가 만능이 아닌 것이다. 동유럽이나 남유럽, 그리고 중동 문화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역화라는 점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시아적 가치가 급격히 증대되고 있는 현 상황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외국어 교육을 위한 또 다른 포석이 절실해 보인다. 이는 러시아어나 중국어, 일본어 등 ‘인접 국가’의 비중을 ‘오히려’ 한층 강화하는 형태의 외국어 교육을 뜻한다.

또 이 맥락에서 영어의 과대한 강조가 문화적 편중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도 한번 짚어보자. 우리가 영어에만 익숙해질 경우 우리는 독해가 가능한 영어 문헌에만 의지하게 되고, 결국 세계는 이런 일방적 안목을 통해서 고찰된다. 지난번 한국인 아프간 피랍사태 때 우리는 이 지역 문화나 언어에 정통한 방송매체나 전문가가 부족해 어려움이 컸다. 그저 영·미의 방송매체에 매달리고 그들의 영어를 중계했을 뿐 그외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일본은 얼마나 현명했던가? 일본은 미국도 알고 있지만 전세계 구석구석 지역 문화에도 정통하다. 기업적 관심사에서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적 관심사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피랍사태가 종결된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반성은 말초적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세계 문화와 대화하기 위한 폭넓은 그물망이 결여되어 있다. 이를테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화려하게 개화된 대안교육학과 개혁교육학에 관한 진귀한 문헌들은 상당 부분 접근 불가의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했고, 현재도 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답답한 교육적 상황을 규정해왔고, 또 그렇게 규정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정신세계를 만들어내는 창조매체라는 것이 근자의 언어철학적 견해다. 우리는 영어를 말함으로써 단순히 의사소통을 할 뿐 아니라 영어로 사고하고 그런 식으로 문화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한 영어가 우리말과 혼합되어 마치 우리말처럼 쓰이고 있는 경우가 부쩍 심해졌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던 세계화에 정당하게 응답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식으로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미국화시켜가는 것일까? 요즘 아이들은 백인이면 무조건 미국인이고, 무조건 영어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왜곡되고 협소한 시각이 세계화된 지구 시민을 보장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영어교육을 새로운 차원에서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현실 적합성 여부를 놓고 공방이 시작되었다. 또 이와 동시에 초등교육 단계에서 정말 강조해야 하는 교육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도 제기되었다.

인수위는 비록 앞으로는 영어를 입시에서 제외하겠다고는 했지만, 현재 소개되는 정도 즉 주당 3시간 정도의 규모라면 실제로 그것은 그 몇 곱절의 하중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제안된 방법들을 일일이 논쟁하기에는 너무 안이하고 귀족적으로 보인다.

한 어린이가 초등교육 단계에서 받아야 할 교육의 진정한 내용이 과연 그런 것일까? 세계화 시대에도 불구하고 향토에 대한 사랑과 모국어, 자연, 사회공동체성, 예술과 체육 같은 과목들이 2차, 3차적인 한낱 부질없는 공부로 치부될 수 없는 교육학적인 이유가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