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66년 여성해방운동의 대표적 단체인 전미여성연맹(NOW·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이 탄생하였고, 67년에는 낙태권을 주요 의제의 하나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이 채택한 전략은 대법원의 사법심사(judicial review)를 통해 당시 여러 주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던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71년 2명의 젊은 여권운동가 변호사는 당시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텍사스의 주법이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Roe V Wade 사건이다.  

73년 미국 대법원은 Roe V Wade 사건의 판결문을 통해 텍사스 주법은 헌법에서 보장된 여성의 사생활(privacy)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며, 어느 주 정부도 임신 6개월에 도달하기 전에 낙태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 과정에서 NOW를 비롯한 많은 여성단체가 법정 조언자로서의 적요서(amicus curiae briefs)를 제출하였으며, 이는 여성의 낙태 선택권이 대법원 판결의 중심에 위치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법원의 Roe V Wade 판결은 미국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판결 이후 미국 여성은 합법적이며 안전하고도 단순한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합법적 낙태수술시 산모 사망률은 과거 불법적 낙태수술 당시의 산모 사망률보다 10배 낮아졌으며, 또한 출산을 하는 경우의 산모 사망률보다도 5배 낮아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낙태의 합법화는 낙태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세력화를 초래하였다. 대법원 판결 이후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도덕적 보수색채의 단체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때부터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주장하는 소위 ‘선택 우선’(pro-choice) 단체와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소위 ‘생명 우선’(pro-life) 단체간의 법적·정치적 투쟁이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두 단체간 정치적 투쟁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생명 우선 단체는 공세(攻勢), 그리고 선택 우선 단체는 수세(守勢)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투쟁 과정에서 낙태문제는 가장 당파적인 이슈 중의 하나가 되어, 민주당은 선택 우선주의자의 편에, 그리고 공화당은 생명 우선주의자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 동안에 수많은 투쟁과 대결이 있었지만 주요 정책 변화로는 77년 하이드 수정법안(Hyde Amendment)과 2003년 부분출산 낙태금지법안(Partial Birth Abortin Ban Act)을 들 수 있다.

하이드 수정법안은 하이드(Hyde) 의원이 예산 소위원회에서 제출한 것으로 낙태의 합법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낙태 관련 재정지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은 낙태수술 시행시 연방 차원의 의료보험 지원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성운동 세력은 이 법안의 통과를 반대하였으나, 당시 의회 예산소위원회의 폐쇄적 성향으로 인해 심의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게다가 당시 상당수 공화당 의원들은 점점 세력이 커지는 생명 우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 카터(Carter) 민주당 대통령도 낙태문제에 관한 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77년 이 수정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많은 저소득층 여성들은 수술비용의 부족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부분출산 낙태금지법안은 임신 말기에 태아를 거의 분만하는 방식으로 낙태를 하는 새로운 수술기법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90년대 말 이 법안은 두번이나 의회를 통과하였으나, 당시 클린턴(Clinton) 민주당 대통령은 이 법안이 여성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여성운동 세력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에 대해 두번 모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다가 생명 우선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공화당 소속 부시(Bush)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인 2003년에야 결국 이 법안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법안의 위헌성 여부가 논란이 되어 많은 주들이 이 법안의 시행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결국 2007년 4월에 와서야 길고 긴 논란이 끝났는데, 이 법안이 Roe V Wade 판례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Gonzales V Carhart 사건과 관련해서 도출되었다.

현재 미국의 낙태정책은 기본적으로 Roe V Wade 판례에 따라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연방주의의 특성상 주 별로 부모 및 배우자 고지, 대기 시간, 의무적 카운슬링 등과 관련해 다양한 방식의 규제도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73년 낙태 합법화 이후 합법적 낙태 건수의 변화 추세이다. 73년부터 80년까지 낙태 건수가 매년 증가하다가, 80년부터 95년까지는 약 120만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95년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감소해 2003년 현재 85만4122건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장기적으로 볼 때 낙태 합법화가 반드시 낙태 증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미국 낙태정책의 변천과정에서 여성운동 세력은 여성의 낙태권 보장을 위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생명 우선주의자들의 세력 강화로 인해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몇차례 여성에게 불리한 법안이 통과된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으로는 Roe V Wade 판결에서 확인된 낙태와 관련된 여성의 사생활권을 성공적으로 수호해왔다. 다만 이 과정에서 여성 관련 부처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쳤는데, 이는 미국 정치체제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여성문제만을 전담하는 한국의 여성부와 같은 부처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법적 권한을 갖지 않는 대통령 자문기구로서 여성 관련 위원회가 존재할 뿐이다.

현재 진행 중인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에서도 낙태정책은 주요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과 오바마(Obama)를 위시한 8명의 민주당 후보 모두가 낙태권에 찬성하고 있다. 반면 8명의 공화당 주자 중에서 줄리아니(Giuliani) 후보만이 유일하게 낙태권에 찬성하고, 다른 7명의 후보 모두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과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이 낙태에 관한 줄리아니 후보의 진보적인 견해를 수용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한편, 한국의 경우 낙태문제는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여성의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낙태는 언제나 도덕적 이슈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낙태가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물으면 좋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낙태문제는 옳고 그름의 도덕적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의 선택 권한과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2개의 다른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매우 정치적인 이슈이다. 이 문제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탈근대적(post-modern) 정치 이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성의 낙태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치 낙태를 승인 혹은 찬성하는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묘사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변화에 대하여 여성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나간다면 머지않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낙태정책에 대한 후보들의 견해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물론 그러한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한국의 여성운동 세력들이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