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째 브라운관은 사극 열풍이다. 새해 첫 화제작도 KBS가 1월5일부터 방영하는 대하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 연출 김성근, 김원석)이다.

사극으로 시작해 사극으로 끝난 최근 수년간 모든 사극은 왕의 면모를 최대한 인간적 매력으로 무장시키는 데 주력했다. 신화의 영웅들은 ‘주몽’과 ‘태왕사신기’를 통해 부드러운 카리스마, 혹은 언제 어디서나 휴머니즘을 최선의 가치로 두는 ‘완소남’ 이미지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2006년 하반기를 강타했던 정조 열풍 또한 정조의 통치 스타일을 소위 CEO로서의 군주로 그려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극중 폐하들께서는 유사 이래 가장 인간적이고 멋지고 세련된 캐릭터로 슈퍼 히어로를 방불케 하는 활약을 보였다.  

물론 사극의 테두리는 남성 중심의 권력투쟁이 관건이다. 그러나 성공작의 진짜 비밀은 따로 있었다. 사극은 이제 매력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내느냐 마느냐로 승패가 갈린다. 왕이 아무리 멋있어도 ‘왕의 여자’들이 눈길을 끌지 못하면 시청자에게 외면당한다. ‘대장금’ 이후 사극의 판도는 바뀌었다. 드라마 ‘주몽’에는 극을 주도한 여걸 소서노(한혜진 분)가 있었다. ‘연개소문’이 외면당했던 이유나 ‘대조영’이 시청률에 비해 화제가 되지 못한 것도 새로운 여성상 창출에 소홀했던 탓이 크다.  

‘태왕사신기’의 태왕 배용준이 그 알듯 말듯한 ‘미소’ 통치만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데는 사신(四神)과 신물들의 힘이 컸다. 배용준은 커피 광고에서 보여주던 미소를 여전히 고수했지만, 대신 기하(문소리 분)와 수지니(이지아 분)라는 두 여전사가 강력한 포스를 자랑했다. 그녀들은 신비하면서도 기품이 있었고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정조를 다룬 숱한 사극들 중 ‘이산’이 유독 인기를 끈 데도 도화서 화원 송연(한지민 분)의 매력에서 차별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그토록 생기발랄하던 그녀들은 한결같이 왕의 사랑을 받고 ‘마마’가 되는 순간 돌변한다. 거칠 것 없던 그녀들의 에너지는 오직 자손 생산과 후궁 괴롭히기(?), 파당 만들기 등으로 입방아를 찧는 데 소모된다. 왕의 순애보적인 첫사랑으로 시작한 ‘왕과 나’가 대표적 사례다. 최근 윤비는 질투와 음모의 화신으로, 성종은 궁 밖의 여인까지 탐하는 난봉꾼으로 한없이 추락한다.

새 드라마 ‘대왕 세종’ 또한 정비 소헌왕후는 어진 ‘조강지처’로, 신빈 김씨는 ‘궁녀에서 발탁돼 세종과 사랑을 나누게 되는 조선판 신데렐라’를 연기한다니, 요즘 대세인 왕실의 억지 ‘로맨스’에서 세종대왕마저 자유롭지 못할 판이다.   

그녀들의 미혼 시절이 아무리 파격적이고 화려한들 ‘결혼’ 후에는 여필종부와 삼종지도뿐이다. 로맨스의 끝은 가부장제의 수호다. 안타깝지만 사극의 여성 캐릭터는 아직도 절반의 성공과 실패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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