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석유문명으로 상징된다. 기초 에너지원에서 석유추출물로 만들어낸 수많은 소비재에 이르기까지 석유는 인류의 삶을 가히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우리는 석유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고 ‘검은 황금’이 보장한 ‘편리한 삶’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한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100년 만에 ‘석유의 역습’이 시작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교란과 재해, 자식으로 되물림되는 화학독성 피해, 영구히 썩지 않는 쓰레기, 석유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인간성 실종…. 석유가 가져다준 문명의 이기가 이제 우리의 삶을 역습하는 부메랑이 된 것이다.

석유문명이 빚어낸 이러한 위험들은 현대 이전에 존재했던 위험과는 근본이 다르다.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불가역성, 지구적 성격으로 인해 인류의 생존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환경 독성화가 질병의 주범

특히 15만여종에 달하는 화학물질로 인한 생활환경의 독성화가 새집증후군, 아토피, 천식, 불임, 기형 등과 같은 질병의 주범으로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여성건강도 예외는 아니다. 외국에서는 유방암, 자궁내막증, 난소암과 같은 여성암의 급속한 증가가 환경호르몬과 관련돼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각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활발하다. 세계적으로 지난 30년간 유방암 환자 수가 2배로 증가했고, 북미의 경우에는 8명 중 1명이 유방암 환자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유방암 증가율이 세계 1위이며, 20~30대의 젊은 여성 발병률은 미국의 4배라는 심상찮은 통계를 가지고 있다.

자궁내막증도 마찬가지다. 최근 병원을 찾는 10~20대의 자궁내막증 환자가 부쩍 늘고, 자궁을 들어내야 하는 여성, 난소암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수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간 연령, 유전, 출산율 저하, 이른 초경 등이 여성암의 주요 원인이라고 밝혀졌으나 최근 양상은 이와 무관하다. 이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환경호르몬의 영향을 주목하고 있다.

이미 금지된 DDT와 PCB는 유방암과 자궁내막증을 일으키는 물질로 확인되었고, 최근에는 플라스틱과 캔 용기 제조에 널리 쓰이는 비스페놀-A(BPA), 화장품 방부제로 사용되는 파라빈이 유방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기도 했다.

‘사전예방의 원칙’ 정책에 반영을

문제는 수천종의 신규 화학물질이 해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이에 대한 건강 위해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1세대 이상의 추적이 필요한데, ‘경제 우선주의’가 이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안전이 입증되기 전에는 사용을 금해야 한다는 ‘사전예방의 원칙’은 이런 현실에서 무색해질 뿐이다.

결국 개인의 자구적 노력이 최선이 될 수밖에 없는 씁쓸한 상황에서 우리는 각종 가공식품, 농약을 친 먹거리, 화학세제, 화장품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유기농, 천연세제, 천연화장품과 같은 대체품을 늘려가는 등 지혜로 버텨갈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 자구책의 한계는 분명하다.

석유문명의 극복은 아니라도 최소한 건강 피해의 규모와 속도를 지연시키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화학물질 규제가 더욱 강화되고, 사전예방의 원칙이 정부 정책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여성들이 목소리를 모아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