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겸손의 미덕으로 여겨
프랑스는 하는말 그대로 믿어

 

파리의 한 카페에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 음료수를 시켜놓고 마시고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 한국에서는 누군가가 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사람도 같은 것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gabapentin generic for what http://lensbyluca.com/generic/for/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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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려서부터 자기가 속한 사회의 코드를 내재화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 습관적인 것에 가까워 대부분 그 타당성 여부를 불문하고 자동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자기가 몸담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이동하게 되는 경우다. 이미 내재화한 사회 코드가 아닌 다른 사회 코드가 존재하는 곳으로 장소를 옮길 경우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이 사회 코드가 크게 다른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이동은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

어려서 서양영화를 볼 때마다 놀랐던 장면이 있다. 주인공인 남녀가 말다툼을 한다. 화가 난 여주인공이 남자에게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남자는 뒤도 안돌아보고 바로 방을 나가는 장면이다. 어쩌면 나가란다고 야멸차게 바로 나가는 남자주인공이 참 신기해 보였는데, 서양에 살고보니 그것이 하나도 신기할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서양의 사회 코드 안에서는 가능한 일인데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상대방이 한 말 뒤에 숨어 있을 의도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따로 있다는 얘긴데, 한국인의 행동을 주도하는 것은 속마음이다.

그러므로 한국 여자가 화가 나서 남자에게 나가라고 외치면 그 말을 곧이 듣고 바로 나가는 남자는 거의 없다. ‘저 여자가 말은 저렇게 해도 실제로 내가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라고 여자의 속마음을 읽은 남자는 방안에서 계속 어물쩍거리기 쉽다. 또 사실 여자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만약에 남자가 실제로 나갔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나가라고 했다고 진짜 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 겉마음과 속마음이 따로 노는 것은 아마도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겸손의 미덕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로 예절에 대한 사회 코드로 이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방문한 집에서 무엇인가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권하면 우선은 거절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한두번 거절한 뒤에 주인이 재차 권하면 그제서야 마지못한 듯 받아먹는 게 관례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그와 정반대다. 마지못해 권하는 일이 없으니 한번 무엇인가를 권할 땐 진심으로 권한다고 믿어도 된다. 그리고 제안을 받은 상대도 반드시 응할 필요는 없다. 마시고 싶지 않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상대방도 두번 권유하는 법이 없는데, 그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한국 유학생 한명이 한국사람 집에 가게 되었다. 집주인이 밥을 먹겠느냐고 권했는데 배가 몹시 고팠지만 일단은 거절을 했다. 집주인이 두번째로 밥을 권했을 때도 거절을 했다. 세번 권하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응할 생각이었는데 집주인이 두번만 권유해서 배를 쪽 곯았다는 얘기를 듣고 한참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의 세번 거절은 역사가 깊은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한국 여행기를 써놓은 책을 지금 읽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조선시대에 판서로 임명받은 사람은 왕에게 세번 거절하는 사직서를 띄운다고 한다. 왕은 당연히 세번에 걸쳐 사직서를 되돌리는데, 그런 후에야 미래의 판서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책을 감지덕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산 지 18년이 되어서 그런지 나도 가끔 우리 집에 들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권유하는데 딱 한번만 한다.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더 이상 권유하지 않는다.

한국에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몇년 전에 한국에 들어갔을 때 한 출판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팩스만 오가다가 한국에 들어갔던 참에 인사라도 할 겸 찾아간 것이다. 서로 수인사가 끝나자마자 이 사람이 말없이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음료수 2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면서 이것 마시라며 하나를 내게 건네주는데 그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어, 나한테 뭘 마시고 싶으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주네’였다.

프랑스에서는 어디를 가든 음료수를 마시겠느냐고 물어보고, 마시겠다고 하면 뭘 마시고 싶냐고 다시 물어본 후 원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이 습관이 된 나의 반응이었다.

이런 겸손의 미덕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요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는 들고 간 선물을 한쪽 구석에 슬그머니 두고 나왔다. 나중에 손님이 가고 난 뒤에야 주인이 꾸러미를 발견하고 그것이 선물로 놓고 간 것임을 알게 된다. 서양에서는 선물을 들고 가면 상대방에게 직접 주고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 선물을 열어본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즉시 한다.

또 한국에서는 작가나 저자들이 무슨 글을 쓰고 난 후 ‘저의 졸작’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졸작’이란 단어처럼 내 신경을 거스르는 단어도 없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졸작이면 발표를 하지 말든지, 아니면 힘껏 써놓은 글을 자랑스럽게 발표할 것이지 왜 발표해 놓고 졸작 운운하는지 모를 일이다.

거절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을 비롯한 동양국가에서는 거절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했다. 상대방에게 거절하는 것이 마치 실례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거절을 못하고 나중에 등 뒤에서 다른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종종 한국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아니, 내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바보가 어디 있어?”

이렇게 겉마음과 속마음이 따로 노는 사회에서 상대방의 속마음을 읽어야 하는 건 듣는 사람의 몫이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겉말만 믿으면 바보가 되는 게 한국 사회다. 한국인들은 속마음 읽는 데 도사이기 때문이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따로 없는 프랑스 사회에서 사는 게 훨씬 쉬울 때가 많다. 모든 건 습관이라고, 나는 이제 한국식의 복잡한 사회 코드에 덜 익숙해 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아주 눈치가 없어진 것이다. 만약 내가 한국의 누군가에게 무슨 일을 제안했는데 거절을 당하면 난 상대방이 아무렇게나 둘러댄 거절의 이유를 액면 그대로 믿어버린다. 그리고 내내 전화를 기다린다. 내게 전화를 주겠다고 했으므로.

한국에서는 이력서를 내거나 어떤 일을 신청했을 때 거절당하는 경우 거의 거절의 편지를 받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답이 없으면 관습적으로 거절인가 보다고 혼자서 추측해버린다. 프랑스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항상 거절의 편지를 받는다. 그래서 일의 진행과 성패가 확실히 구분되어진다. 미련을 남기는 사회가 아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둥글둥글 넘어가는 게 다 좋은 일은 아니다. 싫은 땐 싫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우면 인생은 의외로 살기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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