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각자로, 현모양처로 식민지적 젠더 못벗어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거시 업다고 해요. 사내와 갓히 돈을 버를 수 잇고, 사내와 갓히 벼슬도 할 수 잇셔요. 사내 하는 거슨 무어시든지 하는 세상이야요 …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거슨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요.’  <나혜석 소설 ‘경희’ 중>

 

20세기 초 여학생들이 현해탄을 건넌 이유는 뭘까. 또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조선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일제하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여학생들의 인식과 체험, 돌아온 후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총체적으로 고찰한 책이 출간됐다. 일본 쯔쿠바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과 전임강사 박선미씨가 펴낸 ‘근대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는 생존 유학생들의 구술과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여학생들이 일본으로 떠나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조명한 책이다. 책은 그간 남성유학생, 노동자, 이주자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일본유학생 연구를 여성유학생 중심으로 고찰한 것은 물론, 식민지시대 일본유학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총체적으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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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양성론 따라 수천명이 日유학

책에 따르면, 식민시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조선 여성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1929년 조선에 하나뿐인 여자전문학교인 이화여전에 138명의 학생이 재적한 반면, 일본에서는 21개 여자전문학교에 158명이나 되는 조선인 여학생이 다녔다. 또 1910년 34명에 불과하던 일본의 조선인 여학생은 1942년 2947명으로 늘어났다. 저자는 일본의 미션스쿨이 조선인 여학생의 유학 루트로 활용된 점도 밝혀냈다. 이화학당의 졸업생이 같은 교파인 카쯔이여학교에 유학한 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출신 여학생들이 킨죠오여학교에 유학한 사실 등을 예로 들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많은 여학생들이 일본유학길에 올랐을까. 저자는 1910년대 ‘실력양성론’을 근거로 든다. 구한말 조선에서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배워 사회를 개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직접 서구에 가서 근대문명을 배우는 것보다는 일본에서 한번 검증된 문명을 습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0~30년대가 되면서 이런 실력양성론은 상급학교 진학이나 사회진출 같은 좀더 실용적 이유로 대체된다.

저자는 당시 조선의 교육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일본유학이 있었음을 주목하고 여학생들도 사회진출에 대한 열망으로 일본행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여성들의 일본유학은 봉건적 가족제도에 억눌린 여성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낙후된 민족과 여성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의지 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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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지배현실로 역할 괴리감

하지만 식민지 현실은 여성유학생에게 적잖은 괴리감을 안겨줬다.

일본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학했던 나혜석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여성유학생의 일부는 유학 과정을 통해 여성선각자로서 의식을 갖게 됐다. 이들은 여성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자신의 의사로 결혼할 남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연애로 손가락질 받거나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등 파행으로 치닫는다.

한편, 대부분의 여성유학생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 사회에서 현모양처 의식을 보급하는 데 주력해 성별 역할 분담의 젠더 시스템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등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실제로 여성유학생의 대부분은 가정학을 전공했는데, 가정학은 일본에서 발달한 근대적 가족관을 유학생에게 인식시키고 이런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퍼트림으로써 합리적이고 위생적인 의식생활, 과학적 육아방식, 부부 사이의 동반자적 애정관계를 계몽하는 ‘해방적’ 구실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전시체제가 형성되자 가정학은 조선인의 생활개선운동이라는 ‘내선일체’ 이념에 흡수돼 제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이중적’ 면모를 띠게 된다. 여성유학생들은 애초 근대적 여성관과 가족관을 계몽하는 창구 역할을 자임했으나, 곧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군국의 어머니상’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줄곧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여자중·고등학교에서 가정과 교육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맡는다.

저자는 “조선 여성은 식민지 지배현실이 닦아놓은 길을 택해 지식을 얻고 그 시스템을 돌파해 사회로 나아갔으나, 다시 그 시스템을 강화하는 에이전트가 돼 식민지적 근대 젠더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한계를 보였다”고 설명한다. 박선미 지음/ 창비/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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