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적 상상력으로 가부장제 현실을 꾸짖다

 

지난 2002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첫 방한했을 당시 청와대를 방문해 이희호 여사와 오찬을 함께 나누고 있는 모습.
지난 2002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첫 방한했을 당시 청와대를 방문해 이희호 여사와 오찬을 함께 나누고 있는 모습.
‘리더십 홍수’의 시대를 넘어 ‘리더십 정글’의 시대라고 할 만큼 리더십에 관해 넘쳐나는 관심과 수많은 담론이 존재하는 때에 리더와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방식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리더십에 관해 강의하고 글을 쓰는 필자에게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요구가 쏟아진다. 리더십에 관한 한 A부터 Z까지 ‘리더십에 관한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리더십에 관한 한 어떠한 대답도 부분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리더십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황적, 맥락적으로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사람(리더)의 주변인들(팔로워)을 인터뷰해보면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기도 한다. 리더와의 관계, 함께 했던 업무의 성격, 지위, 기대수준에 따라 같은 사람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분적이고 제한된 자료들을 수집해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틀을 구성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극히 제한적이다. 몇권의 저서와 평전,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수집한 정보들은 마치 조각보처럼 혹은 퍼즐처럼 흩어져 있고, 그것을 내 수준의 ‘여성주의’와 ‘리더십’ 렌즈로 차곡차곡 재배치하여 스타이넘을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제한된 정보와 나의 렌즈가 그녀의 여성주의와 리더십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 이제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리더십을 들여다보자.

첫째 그녀의 리더십은 ‘고정관념과 금기의 영역을 뛰어넘는 여성주의적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

‘여성에게는 왜 참정권이 없는가’, ‘낙태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 ‘여성은 왜 결혼을 기준으로 호칭이 달라져야 하는가’, ‘여성은 왜 특정 영역에 제한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이 바로 여성주의의 출발선이자 여성주의 리더십의 씨앗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페미니트스들의 주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몽상, 또는 공상으로 들릴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거나, 외계인들의 침략에 맞서 지구를 지켜내야 하는 일종의 판타지 소설처럼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할 금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한한 상상력과 도전 의지를 자극하는 창조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스타이넘의 리더십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남들이 의심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보다 나은 삶을 상상하며 디자인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여성주의 리더십의 기본 토대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금기를 상상력과 변화의 에너지로 변용시키는 힘을 가진 창조형 리더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녀의 리더십은 ‘익숙한 고정관념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교란’시키면서 유쾌해지고 강력해진다.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짧은 미니스커트에 긴 생머리,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패션모델 같은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도 외모를 가꿀 수 있고 남성들과 연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페미니스트’.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아름다움’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결합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가부장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명성에 반하는, 그래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수식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부장적 시선을 배제하고 본다면 아름다움이란 페미니스트들이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가부장적 가치가 배제된 아름다움을 거부할 페미니스트는 아마 없을 것이다. 어느 쪽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든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형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남성적 시선을 잣대로 삼을 때도 그녀는 아름답다. 동시에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실행에 옮기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 분야의 리더로서 그녀가 보여준 행보와 삶 역시 아름답다. 이처럼 그녀는 아름다움의 이중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서 녹여내고 있다.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한순간에 교란시키고(juggling) 뒤집어버리면서도, 공존의 여지를 남겨주는 그녀만의 힘, 그로 인해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를 바라보는 팔로워들까지도 저항의 무게를 줄이고 한결 유쾌해진다.

셋째 그녀의 리더십은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가부장제의 현실로 옮겨놓는 실행(performance)을 통해 실존하게 된다.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한 상상과 교란은 말 그대로 공상일 뿐이다. 그러나 실행으로 옮겨진 상상과 교란은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나타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기존의 틀을 깨는 실천은 용기와 결단, 그리고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다. 지배집단의 주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소수 비주류 집단의 경우 더욱 그렇다.

스타이넘은 여성주의적 상상력으로 가부장적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고, 익숙한 것에 도전하고 이를 교란시킴으로써 남성 중심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왔다. 다양한 캠페인과 저술활동, 조직운영을 통해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가부장제의 현실로 옮겨놓고, 남녀관계의 지형과 지도를 새로 디자인하는 성과로 변화의 가능성과 달라진 현실을 보여주었다. ‘리더십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부분이다.

 

넷째 그녀는 신념과 의지에 따라 행동한 선구자적인 역할모델로 기억될 것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현존하는 길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용한다. ‘언제부터 이 길이 여기 있었을까’, ‘누가 이 길을 닦아놓았을까’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감사해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반듯하게 잘 닦여 있는 아스팔트 길이든 미로같이 좁게 나 있는 오솔길이든 그 길은 앞서간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지금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었다.

‘과거에 없었던 길을 새로 만들어내는 사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앞서 보여주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선구자(frontier)’라고 부른다. 스타이넘의 주장과 행동이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때때로 ‘이미 익숙한’, ‘새로울 것 없는’,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존하는 길에 대한 불평불만조차 그 길을 먼저 닦아놓은 선배 덕분에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후배로서 ‘선배들이 닦아놓은 그 길에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 나만의 길을 새롭게 덧붙여 확장해가는 것’, ‘선구자로서 앞서 갔던 선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나를 포함한 후배 여성주의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