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동지서 이혼까지…6명의 영부인
내조·동지서 이혼까지…6명의 영부인
  • 한경미 / 번역가, 자유기고가, 통신원
  • 승인 2007.12.07 10:19
  • 수정 2007-12-07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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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레이디’를 불어로 번역하면 ‘프르미에르 담’이 되는데 프랑스 사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용어다. 그만큼 프랑스에서는 영부인의 위치가 뚜렷하지 않다는 뜻인데, 프랑스 헌법에도 영부인에 관한 언급은 없다. 1958년 드골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으로 들어선 프랑스는 그동안 5명의 대통령이 거쳐 갔다.

#1  프랑스 5공화국 제1대 영부인이었던 이본 드골은 ‘말 없는 여인’이라는 별명답게 항상 남편의 뒤에서 그림자 역할을 했다. 엘리제궁에서 살면서 스스로 장을 볼 정도로 절약형 스타일이었던 이본은 국민들에게 ‘탕트 이본(이본 이모)’이라 불렸는데 시대와 발맞추어가는 전형적인 여성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1967년 엘리제궁의 만찬 리스트에 당시 프랑스의 섹스 심벌 스타였던 브리짓 바르도가 끼여 있었다. 이본은 남편을 말렸는데 이유는 한 가지. 바르도가 이혼녀라는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번이나 이혼한 경력의 바르도를 곱게 보지 않은 것이다. 바르도는 바지 차림과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로 만찬장에 나타나 다시 한번 스캔들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엘리제궁에 초대되면 여자의 경우 곱게 드레스를 차려 입어야 했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야 하는 게 규정이었다. 

#2  드골에 이어 69년에 조르주 퐁피두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프랑스는 제2의 영부인인 클로드 퐁피두를 맞게 된다. 클로드 퐁피두는 보헤미안 성격에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예술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영부인이라는 타이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녀는 엘리제궁의 인테리어를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적 분위기와 근대적인 디자인의 가구로 바꾸는 혁신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을 창조한다. 또한 ‘오트 쿠튀르’를 즐겨 디오르, 카르뎅, 생-로랑 등 최고 디자이너들의 옷을 즐겨 입었는데, 그로 인해 영부인으로서 지나치게 사치가 심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고 ‘마리 앙트와네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녀는 남편에게 현대미술관의 설립을 주장하는데, 그녀의 현대예술에 대한 정열이 없었더라면 현재 파리의 명소가 된 ‘퐁피두 미술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제궁을 ‘불행의 집’으로 불렀던 클로드, 결국 임기 말년에 불치병에 걸린 조르주 퐁피두는 74년 봄 사망한다. 이후 클로드는 엘리제궁을 미련 없이 떠났다.

#3  74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이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안-에몬 지스카르 데스텡이 영부인이 되는 영광을 안는다. 귀족 출신의 안-에몬은 우리나라의 가정학과와 비슷한 ‘여성인류학’을 전공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야심은 컸다. 미국의 케네디와 재클린 커플을 모델로 삼았던 지스카르 데스텡은 자기 아내도 재클린과 같은 현대적인 여성상의 이미지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75년 12월31일, 대통령이 의례적으로 국민에게 하는 TV 연말인사를 끝낸 지스카르 데스텡이 옆에 자리한 아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카메라에 익숙하지 못한 안-에몬은 남편이 시키는 대로 국민에게 연말인사를 했지만 어색한 태도를 감출 수 없었다. 정가와 미디어에서 야유의 시선을 보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아내를 한 회의 장소에 보내 연설을 하게 한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 겁을 먹은 안-에몬이 완전히 굳어버려 그녀의 연설은 아주 엉망이 되고 말았다.

81년 지스카르 데스텡이 대선에서 미테랑에게 패하자 안-에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토록 힘들었던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된 것이다.

#4  81년 프랑소와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니엘 미테랑은 제4대 영부인이 된다.  젊어서부터 정치에 깊숙이 개입돼 있었던 다니엘은 동지로서 나란히 정치의 길을 걷게 된 미테랑이 71년 사회당 당수가 되자 남편을 대통령감으로 미리 점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 남편이 다른 여자를 깊게 사귀고 있었고 그 여자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단히 적극적인 성격의 다니엘은 무엇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미테랑보다 사회주의 사상이 더 깊이 박힌 인물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영부인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만의 정치적인 노선을 구축했는데, 이것이 때로는 남편의 입장과 상반되는 경우도 있어 남편과 정가의 입장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니엘은 96년 1월8일 미테랑이 사망할 때까지 공식 동반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미테랑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것은 미테랑의 숨겨놓은 여인 안 펭조였다. 평생을 그늘에서 한 남자만을 보고 살았던 이 여인에게만 자신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게 한 미테랑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고 한다.

#5  95년 5대 영부인 자리에 오르게 된 베르나데트 시라크는 항상 들고 다니는 핸드백과 고전풍의 머리 스타일로 ‘라 메르 시라크’(‘어머니 시라크’의 불어로 결국 ‘구식의 시라크’라는 뜻)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내의 이런 정치감각을 높이 평가한 시라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내의 조언을 청해 들었다고 한다.

호남형의 자크 시라크는 젊었을 시절에 여자관계도 복잡했다고 한다. 한때는 한 기자와 연애행각을 벌여 이혼 위기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베르나데트가 한 말은 이러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버린 날부터 모든 걸 잃게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결국 아내의 충고로 가정을 지킨 시라크는 아내 덕(?)에 연임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는 기쁨을 안게 된다.

#6  지난 5월 6대 영부인 자리에 오른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이미 여러 면에서 독특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1m78㎝의 훤칠한 키에 모델 출신의 외모와 독립적인 성격, 영부인이라는 위치 등으로 세실리아 마니아 선풍을 일으키게도 했다. 세실리아를 그레타 가르보, 재키 케네디, 다이애나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대인 출신의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실리아는 “나에겐 프랑스인의 피가 하나도 흐르지 않는다”고 언급하는가 하면 “영부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난 청바지를 즐겨 입으며 이미 정해진 틀에 들어가는 걸 거부하는 사람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힌 바 있다.

남편에게 항상 정치를 그만두라고 권했던 그녀는 대선 2차 때 선거를 하러 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시하는 용감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5개월간의 영부인 생활을 접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이혼을 했다. ‘정승자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우리네 속담이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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