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의 나라’에 진정한 행복이 있었다
1966년 모쒀족 마을에서 태어난 소녀 양 얼처 나무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결혼제도가 없는 모쒀족에서는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고, 아버지가 각각 다른 언니와 동생, 할머니, 외삼촌 등과 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모쒀족 말로 ‘얼처’는 ‘보석’, ‘나무’는 ‘공주’를 의미한다. ‘보석 공주’라는 뜻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얼처 나무에게 어느 날 우연히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지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부족을 떠나 자신의 재능과 꿈을 발견한다.
바깥 세계를 접하고 돌아온 나무는 몇달 만에 집에서 도망쳐 상하이 음악학교에 입학, 정식으로 음악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베이징에 있는 중국 소수민족 가무 앙상블에서 활동했다. 90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후에는 모델로 변신해 이탈리아와 일본, 홍콩, 미국을 누비며 활약했다.
최근 출간된 ‘아버지가 없는 나라’는 모쒀족 소녀 나무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성장기인 동시에 중국 소수민족인 모쒀족의 문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인류학 보고서다. 성인식인 ‘치마 의식’, 춤과 노래로 서로의 짝을 찾는 ‘여신 의식’, 남자가 여성의 집에 찾아가 사랑을 나누는 ‘주혼 풍속’ 등 모쒀족의 독특한 풍습들이 나무의 경험과 엮여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나무와 함께 중국 모쒀족 연구 허가를 받은 최초의 서양 인류학자인 크리스틴 매튜가 공동집필한 이 책은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깊이 있는 인류학적 지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냈다.
그들은 결혼제도가 없는 대신 여성이 사랑을 선택하는 주혼이라는 방식으로 자손을 이어간다. 모쒀족 여성들은 평생 동안 여러명의 애인을 갖는다. 남성이 애인의 집을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면 여성은 문을 열어 그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 남성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면 문 앞에 그의 가방을 걸어둔다.
결혼을 하지 않되 남녀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으며, 모계를 중심으로 대를 이어가는 방식은 성적인 자유와 사랑, 경제적인 안정과 혈통 유지,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가부장의 권위나 억압이 없는 이런 방식에 남자들도 만족한다는 점이다.
모쒀족 사람들은 주혼이 남녀관계를 순수하고 즐겁게 유지해주며, 모계의 대가족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툼을 벌이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지난 2005년 “35년 내 일부일처제는 사라질 것”이라며 결혼제도의 종언을 예언했던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달리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모쒀족의 이런 생활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서부를 제외하곤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혁명이 소수민족에게까지 침투하고 경제자유화나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최근 모쒀족의 모습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외부로 돈을 벌러 나가고, 이 마을의 주수입원은 관광업이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오래 전 인류는 모계사회에서 살았으나 농경생활을 시작한 후 무거운 농기구의 사용과 함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남성들의 강한 힘이 필요하게 되면서 부계사회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보를 쫓아 이동하는 ‘신유목민 사회’가 도래한 지금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들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지구촌에는 신(新)모계사회가 펼쳐질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안적 가족모델을 유지해온 중국 모쒀족의 삶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제도와 관습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결혼과 가족에 대해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양 얼처 나무·크리스틴 매튜 지음/ 김영사/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