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나름대로 여성운동·정책 꾸준히 발전
다른 아시아국은 더 열악… 우리가 도울 때다

내가 15년간 관계를 맺어온 국제단체로 APWLD(Asia Pacific Forum on Women, Law & Development)라는 단체가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성운동 네트워크로 태국 치앙마이에 사무실이 있다.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아 3일간의 축하행사를 이달 말에 방콕에서 열 예정이다.

APWLD의 창립 과정을 보면 유엔 세계여성회의가 미친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즉 1985년에 제3차 유엔 세계여성회의가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개최되었을 때 참가자들이 토론하는 중에 여성의 삶에 있어서 법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공감대가 모아졌었다. 법은 국가가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자원, 권리, 그리고 여성의 몸까지 통제하지만 동시에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법을 활용하는 것이 유용한 전략이라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86년 말에 아·태지역에 APWLD가 창립되었고, 비슷한 성격의 단체가 아프리카(WILDAF)와 라틴아메리카(CLADEM)에도 각각 창립되었다.

APWLD는 이번에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자매단체들과 함께 그동안의 성과를 평가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질 예정이다. 20년을 지내오면서 APWLD는 아·태지역 23개국, 150여명의 회원을 가진 단체로 성장하였고, 다른 두 대륙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직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과연 법이 상관이 있는가? 법을 이용해서, 또는 법을 변화시켜서 여성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전략은 유용한가? 여성은 법적 정의를 누리고 있는가? 90년대를 법 제정운동으로 보낸 한국의 여성운동은 이 물음에 물론 ‘예스’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평가가 나올지 궁금하다.

APWLD에는 다루는 주제별로 5개의 태스크포스(여성폭력, 농촌·원주민, 노동·이주문제, 여성정치참여, 여성과 환경)와 모든 태스크포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여성인권 실무그룹이 있다. 나는 92년부터 몇년간 여성폭력 태스크포스에 속했다가 전체 의사결정기구인 지역위원회, 그리고 더 핵심적인 운영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2004년부터는 여성인권 실무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APWLD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한국 여성의 현실이 아시아 다른 나라 여성의 현실과 이제는 정말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은 우여곡절을 겪어오면서도 나름대로 여성정책은 계속 발전해왔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온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에서 여성운동가들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동안 나아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본주의가 강화되고 여성의 삶은 더 고달파졌다고 토로한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 그리고 양성평등의 신장, 이 세가지에서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다르다는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미얀마의 여성들이 군부독재를 피해 조국을 떠나 태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소수민족 여성으로서 군인에 의해 강간당한 사실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의 독재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또 유엔 직원에서부터 가정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로 흩어져 외화를 벌어 보내는 필리핀 여성들을 보면서 우리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돈 벌러 갔던 시절을 상기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의 형편이 좀더 나은 만큼 이제는 다른 나라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느끼게 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APWLD 20년 역사상 올해 처음으로 한국인 여성이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당히 50대 1의 경쟁을 뚫고서 말이다. 내 추천서가 약간의(?) 힘을 발휘했겠지만 이제 우리의 젊은이들 중에서도 국제여성NGO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하나 둘 생기는 것 같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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