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성신문들 재발굴·재조명 필요"

 

'신문'의 형태로 첫 등장한 미군정기의 여성신문들에 대한 연구, 특히 여성운동과의 연관 관계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다. 2002년 가을 '한국언론정보학보'에 실린 '미군정기의 여성신문과 여성운동' 논문으로 이 '공백' 부분을 메우고자 시도한 유일한 언론학자가 바로 박용규 상지대 교수(언론광고학부)다. 그와 여성신문들의 의미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았다.

미군정기에 여성신문이 일간지 형태로 다수 발행됐다는 것은 의외다. 언론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46년 3월21일 '가정신문' 창간을 시작으로 '부녀신문', 47년 '여성신문' '부녀일보' '부인신보' 등 5개의 여성일간지가 등장했다. 60년대 초 '여성일보' '부인일보'가 창간됐다가 곧 폐간된 후 아직까지도 여성일간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특정 시기에 5개의 여성일간지가 발행됐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못해 당시의 여성운동을 연구하면서 여성일간지들을 보조자료로 활용했을 뿐이다."

여성매체가 그토록 간과된 이유는 무엇인가.

"90년대 스타이너나 김혜순, 최선렬 같은 언론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여성과 미디어에 관한 기존 연구들이 주로 주류 미디어에서의 여성 역할과 여성 묘사에 집중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대안적 미디어로서의 여성미디어에 대해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여성일간지들에 대한 평가가 좀 부정적이다.

"좌우익 성향 여성일간지들은 다소 입장 차이는 있으나 문맹퇴치와 의식계몽을 공통적으로 주장했다. 여성교육을 주장하였지만 문소정 같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반봉건적인 가부장제의 개혁'까지는 나가지 못한 채 '민족독립을 위한 개명한 현모양처'론에 국한됐다. 단, '여성신문'과 '부인신보'가 여성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신문들이 결국 폐간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신탁통치로 좌·우 진영이 극심한 대립을 빚었던 시대적 상황 탓이 크다. 때문에 이들 여성신문은 정치의존적이고 남성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즉 주류 남성들의 정치활동의 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매체가 독자적인 여성운동 노선을 취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여성 문맹률이 90%를 넘는 데다가 태반이 경제력이 없어 신문을 구독할 여성독자층이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실패 요인 중 하나다."

'여성신문'과 '부인신보'의 두 발행인인 황기성과 박순천은 우익진영으로 46년 1월9일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을 함께 조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일간지 창간에 둘이 힘을 모았다면 매체의 생명이 더 길지 않았을까. 아쉽다.

"후에 황기성은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로, 박순천은 이승만 계열로 정치적 노선이 갈리게 된다. 박순천은 국회의원, 최초의 여성 당수(민주당) 등 여성정치인으로 승승장구했지만, 황기성은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6·25전쟁 당시 민족운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납북된 후 행적을 알 길이 없다. 당시 여성운동계에서 박순천보다도 더 높이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독립촉성애국부인단에서도 초대 회장에 황기성이, 부회장에 박순천이 임명됐을 정도니까. 두 발행인의 성향에 따라 '여성신문'은 좌우합작을 위한 여성 나름대로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조로, '부인신보'는 여성들이 우익만의 국가수립 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논조로 입장 차이를 보였다."

박 교수는 "자료가 많이 부족해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으나, 황기성의 마인드나 역량이 박순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며 "역사의 비극 속에서 실종된 황기성과 이로 인해 '잊혀진 여성신문'을 재조명하는 것이 여성매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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