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정체성민주화 신념에 비폭력의 희생

 

1988년 '8월의 랑군' 이래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선 아웅산 수지는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을 보여주는 모델로 삼을 만하다. 결코 상징적 존재로 그치지 않는다. 아웅산 수지는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의 경험과는 다른 조건에서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보여주지만, 어떠한 지도자라도 갖추어야 할 요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첫째, 정치적 지도자는 우선 뚜렷한 자아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라 불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자존심은 아웅산 수지의 정체성의 근본이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건국의 정신이 망가지는 것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녀를 정치적 활동으로 끌어당겼다. 확고한 자아 정체성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에 대해 가치 있는 판단력을 갖게 한다. 자신의 도덕감에 대한 신뢰 없이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 수도 없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다. 아웅산 수지의 도덕성의 기본은 불평등에 대한 강한 저항과 불평등 해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며, 그녀의 리더십의 정당성은 일관된 말과 행동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둘째, 리더십은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뿌리를 둔 비전에서 나온다. 지도자의 비전은 추종자들에게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 아웅산 수지에게는 국가의 미래, 민족의 미래, 민중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하며 이를 토대로 대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자기가 제시하는 비전을 추종하게 만든다. 미얀마 국민에게 자유로운 미래를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외국생활 중에 미얀마의 문제에 대해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것을 정치활동으로 연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셋째, 민주적 리더십은 제도와 규범의 운영에 관한 것뿐 아니라 민중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갖추어야 한다. 아웅산 수지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염려를 진심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희망과 힘을 믿고 있다. 아웅산 수지는 그런 점에서 항상 국민을 염려하고, 특히 사상의 차이를 이유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짓밟힌 꿈에 대해 깊은 염려를 표현한다.

그녀는 주목받지 않고도 희생을 하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생존에 대한 불안과 자기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에 대해 혼란을 겪는 어린아이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보통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은 그런 조건을 초래한 독재정권에 강한 저항을 하게 하는 힘일 수도 있다.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욱 대중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탄압하는 정권을 반대하는 것이다. 대중의 힘이 없이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지도자는 사람들의 자발적 추종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대중과의 소통이 스스럼없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웅산 수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국민이 편견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연금이 풀리는 틈틈이 마을을 찾아가 국민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철학,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넷째, 아웅산 수지의 리더십의 중요한 특징은 비폭력적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를 달성해야 한다는 신념에 있다. 불가피한 약점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왜 민주주의가 다른 것보다 나은지를 대중에게 설명하며,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은 비폭력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확고한 신념은 용기로 뒷받침된다. 누구도 20년 가까운 가택연금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진심어린 사명감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민중의 생존권을 찾아주기 위한 애정과 평화를 위한 집념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다. 이 용기는 희생이 따라주어야 할 때가 많다. 재입국이 안될 것 같아 남편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 자녀들을 멀리 두고 혼자서 결코 짧지 않은 가택연금 생활을 하는 것은 다른 일들과 함께 큰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마음만이 이러한 희생을 가능하게 한다. 용기는 공격을 받고 모함을 받는 것을 견디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다스리면서 평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수련의 방법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더욱 빛난다. 

다섯째, 아웅산 수지의 리더십은 조직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량에 달려 있다.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충분한 상징성이다. 어쩌면 아웅산 수지의 리더십은 직접 함께 움직이지 않는 특유의 조건 때문에 더욱 상징성이 커졌는지도 모른다. 민족민주동맹은 계획적으로 반정부 시위와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아웅산 수지가 연금되어 있는 집 앞에서 시위를 하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자기들의 의지를 굳히고 있다. 그녀의 상징성은 미얀마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는 데 그 어떤 방법보다도 효율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역시 힘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가 미얀마에 정착할 때까지 가택연금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희생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보고 깨닫도록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웅산 수지를 보면서 힘을 얻고 따라하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리더십의 본질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면 '너무 편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고 한다. 정치투쟁에 있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그녀의 리더십의 남다른 모습이다.  

아웅산 수지의 리더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조건이 결여된 위기 속에서 발휘되는 능력이기에 리더십의 기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상적이며 평화로운 일상이 가능하며, 위기상황이 아닌 가운데 키울 수도 있고 발휘할 수도 있는 리더십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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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지도자 이자 '세계적 양심'우뚝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는 1945년 6월1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어머니 킨 지(Khin Kyi) 여사와 미얀마 독립운동을 전개한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2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식민지였던 미얀마 독립을 위해 군대를 조직해 투쟁했던 영웅으로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웅산은 1947년 7월19일 독립을 눈앞에 두고 32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돼 사망했다.

15살이 되던 1960년 어머니 킨지 여사가 인도 주재 미얀마 대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어머니를 따라 뉴델리로 이사했다. 인도의 명문 델리대학교를 다녔다.

평벙한 주부에서 민주화 투사로

대학 졸업 후 1964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 세인트 휴즈 컬리지에서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3년간 뉴욕의 유엔사무국에서 행정 및 예산문제 자문위원회의 비서로 근무했다.

수지는 1972년 옥스퍼드대 재학 시절 만난 영국인 마이클 아리스와 결혼했다. 마이클은 대학에서 티베트와 히말라야 문화를 전공했으며, 당시 옥스퍼드와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결혼 이후 수지는 두 아들 알렌산더와 킴을 낳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후 1985년 일본 교토대에서 동남아연구소 교환교수로 재직했다. 1987년에는 인도의 선진학문연구소에서 특별연구원으로 일했다. 1988년 4월 어머니 킨 지 여사가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병을 위해 미얀마로 귀국했다.

당시 미얀마는 1962년 이래로 네윈 정권이 이끄는 사회주의계획당의 일당 지배체제가 지속되면서 심각한 경제난과 군사독재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대학생과 청년을 중심으로 벌어지던 민주화 시위는 점차 농민, 노동자, 승려들이 참여하는 전 국민의 투쟁으로 확대됐다. 그해 8월8일 양곤에서 벌어진 집회에서 군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고, 이때부터 약 1주일 동안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수지는 본격적으로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 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그는 8월15일 학생운동 지도자와 정부 간의 협상을 중재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9월24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야당세력을 망라한 전국민주연맹(NLD)을 창설해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전국민주연맹은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목표로 출범한 미얀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었다.

수지는 전국 각지를 돌며 시위·집회·연설을 주도했으며, 군사정권에 대항해 평화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1989년 7월20일 국가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고, 수지를 국가보안법 소요선동 혐의로 가택 연금했다.

1990년 5월27일 총선이 실시됐고, 총 485석의 의석 중 392석, 즉 82%에 달하는 절대다수의 의석을 전국민주연맹이 차지했다. 그러나 군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고, 전국민주연맹의 지도부와 당원들을 투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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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총선 압승… 리더십 증명

이후 수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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