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밥상에'식생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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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현기순 교수는 현재 93세의 고령으로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대화를 나눌 때도 귀가 어두워 상대가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다. 이에 필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의 자택을 방문하기 전 사전조사 차원에서 현 교수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인 홍성야 전 인하대 교수를 만났다.

다행히 홍 교수는 스승인 현 교수에 대해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에 걸쳐 많은 기억들을 떠올려주었다. 행신의 현 교수 자택을 방문했을 때 함께 인터뷰에 응해준 현 교수의 여동생과 제자인 홍성야 교수, 그리고 행신 자택에 남아있는 옛 자료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엮었다.

1950년대 밥과 김치가 주식이던 한국인의 식단을 이름도 생소하던 탄수화물, 단백질 등 영양학적 관점에서 분석, 식단의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치며 누구랄 것도 없이 궁핍했던 시절에 현 교수는 5가지 기초식품군을 토대로 식생활의 혁명을 일으켰다.

현 교수는 당시 미국 유학을 통해 잘 짜인 식단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한다는 사실을 몸소 익히고 체험한 후, 5가지 기초식품군을 국내에 도입했다. 많은 여성들이 가정교과서에서 배운 1군 단백질, 2군 칼슘, 3군 무기질과 비타민, 4군 탄수화물, 5군 유지류 등 5가지 기초식품군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다.

현 교수는 앞치마에 5가지 식품군을 글자와 그림으로 새겨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기초식품군을 알리고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달 초 필자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화정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현 교수는 당시 만들었던 분홍색 앞치마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한 마음으로 어우러져 분홍색 천 위에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분홍색 앞치마가 바로 한국인의 식단에 대해 영양학적인 관점의 접근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신랑보다 시아버지 모습이 너무 멋있었지"

그는 1919년 11월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인 1919년은 일제강점기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가 변화무쌍하고 숨 가쁘게 돌아가던 때였다. 그 해 2월6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우리 유학생들이 대한독립 선언문을 선포했고, 3월1일을 기점으로 범민족 항일운동인 대한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맑은 물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누런 금반지를 건져 올리는 태몽을 꾼 어머니는 태몽도 태몽이지만 성장하면서 유달리 기억력이 좋고 영특한 딸 기순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현씨가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기순은 근면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강한 생활력으로 자수성가한 그의 부친은 종로에서 시계포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백부도 일찍부터 일본과 무역을 시작해 부를 일군 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만한 큰 규모의 시계포 '보신당'을 운영했다. 두 사람은 서로 업종이 같다보니 의논하고 상의할 일도 많아 왕래가 잦았다. 이 과정에서 백부는 일본과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어린 기순에게 알게 모르게 전해주었다. 일찍부터 세계관을 불어넣어준 셈이었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았다. 근검절약하는 와중에도 교육에 필요한 물품은 아끼지 않았다. 자연히 자식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9남매 중 4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기순은 경기여고(26회)를 졸업한 후 초등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교사를 하다가 결혼을 서두르는 당시의 관습대로 20대 초반에 선을 보았다. 매사에 일본의 감시가 심한 때라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워 조혼이 성행하던 때였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신랑감은 경기도 평택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첫눈에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귀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기순은 수줍음을 많이 타 선볼 때 곁눈질로 신랑감의 얼굴만 한번 슬쩍 쳐다본 게 다였다.

"당시 서울역 식당에서 선을 보았는데 많이 부끄러워 신랑 될 사람 얼굴은 제대로 볼 수도 없었지. 그런데 나를 물끄러미 보시던 시아버지 모습은 오히려 시선이 편안했어. 어찌 보면 정작 신랑보다 커피를 마시는 시아버지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 미래의 신랑 모습이 바로 저럴 것이다 싶어 결혼을 결심한 건지도 몰라."

현 교수는 아련한 눈길로 7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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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생활 7일뿐…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신랑 될 사람이 결혼을 위해 잠시 고국에 들른 차여서 두 사람은 선본 후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치르고 7일 후 얼굴을 제대로 익힐 틈도 없이 신혼의 남편은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 기순은 그래도 곧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시부모를 모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남편이 일본으로 다시 간 지 한달도 안돼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편과 보낸 시간은 단 7일. 그나마 대부분의 시간을 시댁 식구들하고 함께 지내 두 사람만 온전히 보낸 시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꿈결 같았다. 기순은 사고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7일간의 결혼생활이 기순에게 남긴 것은 아이 하나 없는 '청상과부'라는 타이틀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결혼하면 시집 귀신이 돼야 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남편이 죽었어도 시집을 떠날 생각은 엄두도 못냈다. 기순은 남편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자신 앞에 놓인 암담한 미래에 눈물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행히 시아버지는 이런 며느리를 더욱 아끼며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기순의 마음에는 이미 변화의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시집에 머물려 해도 마음이 뜻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변화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시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남편을 여읜 기순을 아끼고 귀여워하는 데 대해 시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드러냈다. 시아버지의 멋스런 차림과 생활방식은 주변의 여자들로 하여금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시어머니는 평소에도 남편 근처에 있는 여자들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이미 첩을 두고 있는 형편이라 시어머니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려 해도 마음은 늘 질투와 애증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시아버지가 기순에게 잘해줄수록 시어머니의 구박은 날로 심해갔다.

'아기 하나 안남긴 결혼생활을 이젠 미련 없이 털어야 할 때다.'

시부모 사이에서 가슴앓이를 하던 기순은 7일간의 꿈같은 인연을 남긴 남편을 가슴 속에 묻고, 남은 생에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배움과 교육의 중요성을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늘 새기고 있던 터라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를 하면서 시집이 있던 평택을 떠나 서울로 왔다.

뒤늦게 대학에…미국유학은 또다른 시련

서울! 새로 돌아온 서울은 남다른 감회로 가슴에 와 닿았다. 기순은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수 없었고, 그러고도 싶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서울대 사범대학 가정과에 입학했다. 당시 가정과 수업을 듣던 5명의 학생 중에 주정혜, 이해숙 등 4명은 동기였고, 기순 혼자만 늦깎이였다.

기순은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적극적이고 다부진 성격이었다. 어려움을 딛고 남다른 각오로 공부한 덕분에 남들보다 늦은 입학에도 불구하고 졸업 무렵에는 성적이 좋아 미국 유학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 유학을 꿈꾸는 것은 웬만큼 선구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기순은 당시 서울대 총장이던 고 이춘호 박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웨슬리언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정했다. 웨슬리언대학은 오클라호마주 비틀즈빌에 위치해 있으며, 김활란 박사와 김옥길 선생이 공부했던 곳이다.

막상 유학을 떠나려고 하자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미국까지 갈 비행기 삯이 너무나 비쌌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집 한채 가격이 미국행 편도 비행기 삯과 맞먹었다. 기순은 서울 신설동 26평짜리 집을 팔아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 또 이춘호 총장의 추천으로 웨슬리언대학의 장학금을 받게 돼 다행히 학비문제가 해결되었다.

그의 나이 당시 26세. 광복의 기운이 한창 무르익던 조국을 뒤로 하고 여유자금이라고는 한푼도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만 달랑 실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도착한 미국땅은 또 다른 개척지이자, 첩첩이 넘어야 할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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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익히랴, 관습배우랴, 생활비에 3중고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관습도 너무 다른 낯선 땅. 기순이 몸에 지닌 것은 배우겠다는 신념 하나뿐이었다. 수업 내용을 알아듣고 현지인들과 말이 통하는 게 급선무였다. 영어를 익히고, 너무도 다른 현지의 관습을 배우며, 게다가 부족한 시간을 쪼개 생활비를 버는 3중고의 생활을 기순은 이어갔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기숙사에서 밤 늦도록 공부를 했다.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어도 다음날 또 다시 부딪쳐야 할 언어와 현지생활에 대한 고민으로 선잠이 들곤 했다. 그때 다리 한번 제대로 못뻗고 잔 탓인지 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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