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인의 가족이 올 가을에 파리 유학을 왔다. 서울의 프랑스 고등학교에 다녔던 딸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오게 됐는데, 같이 프랑스 학교에 다녔던 남동생도 누나를 따라 왔다. 이들을 보살펴줄 목적으로 엄마도 같이 따라왔고, 아빠만 서울에 남아 일명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이 가족의 파리 정착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이들이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착하는 날 미리 구해놓은 아파트에서 이들 가족과 집을 구해준 복덕방 사람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여름휴가를 가기 전에 내가 방문해서 'OK' 했던 집은 9층이었는데, 이들이 계약한 집은 8층이란다. 층수만 다르지 똑같은 아파트라는 복덕방 얘기에 9층은 방문하지도 않고 계약을 한 게 착오였다.

실제 아파트 내부를 보니 시설이 9층보다 형편없었다. 5년 살던 이전의 입주자가 전날 이사를 갔다고 하는 걸 보면, 새 입주자를 받기 전에 수리를 할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한 애들 엄마가 집을 보더니 맘에 안든다고 울상을 짓는다. 이미 계약을 했으니 들어와야 한다는 복덕방 사람 사이에서 내 입장이 난처해졌다. 다른 아파트를 물으니 이것보다 평수가 작은 방 2개짜리가 나와 있다고 한다. 토요일 근무시간인 오후 6시를 넘긴 시각인데도 중국인 복덕방 양반은 다행히도 순순히 다른 집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이 아파트는 파리 남쪽 13구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고층아파트 촌에 있었다. 평수는 작으나 빛이 환히 들어오는 게 괜찮아 보였다. 애들 엄마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당장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고 월요일날 복덕방에 가서 확인을 해본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급한 불은 끈 셈이지만 당장 그날 저녁에 어디서 자느냐가 문제였다. 서울에 남아있던 애들 아빠가 국제전화로 파리의 한국인 숙소를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민박을 하는 분이 아파트를 임시로 세 주는 게 있다고 해서 며칠 그리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이 가족이 몇년 전에 파리에서 3년 살다 간 경험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나마 임시대책을 세울 수가 있었다.

월요일날 복덕방에 전화했더니 아직 결정이 안났으니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며칠이 불안한 상태로 지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사이에 아직 학교가 정해지지 않은 아들의 학교를 구해야 했다. 개학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나 사립학교를 구하느라고 아직도 학교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파리의 사립학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국가 재정을 보조받는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로 당연히 학비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여러 군데 전화를 돌려보니 학비가 비싼 학교에는 그래도 빈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국가 보조를 받는 사립학교를 원했다. 정 안되면 공립학교에라도 들여보낼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전화를 돌려본 사립학교에 자리가 하나 난다고 해, 부랴부랴 그곳으로 달려가서 원서를 받아 그 자리에서 작성해 제출하고 왔다. 연락이 오기까지는 다시 며칠이 지나고, 그 사이에 다시 몇번인가 전화를 한 후에 드디어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결국 입학이 허락되었다.

'좋은 일은 여러개가 한꺼번에 온다'는 프랑스 속담처럼 며칠 후에 이 가족은 아파트에 입주를 했다. 그런데 가구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 아파트에는 전기마저 끊어져 있었다. 즉시 전기 신청을 했더니 약속을 5일 후로 잡아주는 게 아닌가? 몇 개월 동안 비워 놓았던 집이고 이전 입주자가 전기를 아예 끊어놓고 갔기 때문에 기술자를 보내야 한단다.

이 가족은 5일 동안 전기 없이 살았다. 애들은 낮에는 학교 식당에서 먹고, 저녁이면 가족이 근처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 하나씩을 먹으면서 지냈다. 다행히 약속대로 5일 후에 전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전화국에 연락을 해 인터넷과 함께 전화 설치 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일주일 후에나 연결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약속한 날이 되어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하니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다.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대답이 달라지는 프랑스 특유의 방식이다.

집 전화가 개통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이용하겠다고 휴대폰을 사러 갔다. 각자 마음에 드는 휴대폰을 정하고 돈을 내려고 엄마가 갖고 있던 수표를 냈더니 또 문제가 생겼다. 프랑스에서는 결혼한 부부는 보통 은행 공동계좌를 갖고 있다. 그래서 부부가 같이 수표책을 사용하는데 이 엄마가 갖고 있는 계좌는 남편 명의로 되어 있었다. 수표계좌를 부부계좌로 바꾸지 않는 한 휴대폰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표를 부부계좌로 바꾸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결국 허탕치고 휴대폰도 구입하지 못했다.

다음에는 성인이 된 딸에게 은행계좌를 하나 열어주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프랑스 은행에 갔다. 계좌를 개설하려면 체류증과 여권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준 체류증 만드는 서류 리스트에는 은행계좌를 적는 난이 있었다. 결국 체류증 만드는 데에 은행계좌가 필요하고, 은행계좌 만드는 데에 체류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행정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서로 맞물리는 경우가 프랑스에서는 드물지 않다. 결국 계좌 개설하는 데 체류증이 필요 없다는 한국외환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했다.

기다림의 연속인 프랑스 생활. 이 가족도 그럭저럭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다. 애들이 불어를 잘 해서 학업을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애들 엄마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부엌의 수돗물이 잘 안빠진다는 것이다. 연락병인 나는 다시 복덕방에 전화를 했더니 기술자를 보내려면 2주를 기다려야 한단다. 뒤로 넘어갈 일이다. 2주가 지났는데도 기술자는 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드디어 하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콸콸 넘쳐 집안에 온통 홍수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 복덕방에 전화를 했더니 그제서야 다음날로 기술자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5일 동안 전기도 없는 깜깜한 집에서 살면서 이 가족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파리에 와 있는 게 맞는 거야?'

이곳 프랑스는 인건비가 비싸고 경쟁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나 서비스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프랑스에 살면서 '내가 아프리카에 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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