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동안 합숙, 피아노레슨 받고
소박하고 따뜻한 한국식 정 느껴

 

르네 집의 피아노실. 피아노 위에 걸려있는 그림이 르네의 작품이다.
르네 집의 피아노실. 피아노 위에 걸려있는 그림이 르네의 작품이다.
남편이 교사라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는 긴 휴가를 떠난다. 남들처럼 시골에 정원 딸린 작은 별장이라도 갖고 있으면 7~8월의 여름방학 두 달을 조용히 시골에 파묻혀서 보낼 수 있으련만, 우리는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미리미리 휴가계획을 세워 예약을 해놓지 않으면 안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방학이 다가왔고 우리는 7월 초에 짐을 꾸려서 긴 휴가길에 올랐다.

우선 시집에 들러서 일주일 동안 편안히 쉬고 다음 여행지로는 우리가 항상 가는 알프스에 가서 다시 열흘을 머물렀다. 그리고 세번째 주가 시작하는 7월21일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피아노 휴가'를 즐기러 프랑스 남부 드롬 지방으로 떠났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늦게라도 배우겠다고 작정한 나는 1년 전에 중고 피아노를 하나 사서 일주일에 30분씩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아왔다. 피아노를 치면서 우연히 알게 돼 정기구독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음악잡지에서 광고를 보게 된 것이 이번 피아노 휴가의 서곡이 되었다.

어떤 피아노 개인교습 선생님이 여름방학 때 일주일 단위로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재워주면서 피아노 집중 레슨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름을 또 어디서 보내야 하나, 고심하고 있던 차라 반가운 마음에 당장 전화기를 돌렸다. 지난 5월의 일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울리는 쾌활한 목소리는 중년여인의 것이었다. "내가 피아노 휴가에 관심이 있는데, 남편 딸린 몸이라 남편도 같이 가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조금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러면 남편은 공짜로 받아주겠다"고 답변하는 게 아닌가. 학생 1인당 가격으로 우리 커플을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7월 셋째주로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원래는 학생에게 자기네 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내주는데, 우리가 커플이니까 자기네가 새로 수리한 독립아파트를 우리에게 내주겠다는 것이다. 원래 휴가객들에게 일주일 단위로 빌려주기 위해 지은 것을 우리에게 내주겠다고 하니 엄청 친절한 제안이었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렇게 커다란 혜택을 두 가지씩이나 베푸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거의 드문 일이다.

피아노 선생님이 너무 친절하게 나오니까 약간의 경계심이 생겼다. 그동안 19년이 다 돼가는 프랑스 생활의 경험에 의하면 처음에 너무 친절하게 나오는 사람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서로 잘 맞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세끼 밥을 같이 먹고, 하루에 5시간 피아노 레슨을 받는 등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고역일 수도 있었다.

드디어 7월21일이 되었고, 모험을 떠나는 심정으로 우리는 드롬 지방으로 향했다. 알려준 대로 집을 찾아 들어가니 선생님 부부가 정원에서 화단에 물을 주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로 통화했을 때는 금발머리의 선생님을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처럼 검은 머리에 생각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분이었다. 같이 인사하는 남편은 의외로 더 젊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일주일을 이 집에서 너무 행복하게 보냈다. 올해 65세인 르네는 여러 가지로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우선 25년째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는데 순전히 독학으로 배운 거였다. 혼자 독학으로 솔페지오를 배워서 학생들에게 음악이론도 아울러 가르치는데, 요점만 챙겨서 아주 쉽게 가르친다. 음악이론과 실기를 나누어서 교육하는 프랑스답게 이들의 음악이론 교육의 질은 무척 높았다.

이 집에서 일주일 동안 있으면서 난 거의 강행군을 하다시피 했다. 오전 8시30분의 아침식사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일어나 아침을 먹은 후 9시30분부터 11시까지 레슨을 받았다. 11시가 되면 르네는 점심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가고, 나는 12시까지 복습을 하거나 피아노 실기연습을 혼자서 했다. 르네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오후엔 각자 자유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다시 실기 레슨을 하는 식으로 레슨은 이루어졌다. 어떨 때는 자정까지 나를 붙잡아두고 수업을 했고, 음료수도 주고 과일도 잔뜩 주는 등 한국의 시골아낙처럼 인심이 후했다. 이 집에는 무화과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마침 열매가 한창 열릴 때라 직접 따주는 무화과를 엄청 많이 먹었다.

르네의 또 다른 직업은 화가다. 이것도 독학으로 이룬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계속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직접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은 5년 전이었다고 한다. 르네 나이 60세일 때다. 60이란 나이에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 용기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6개월 정도 그림 수업을 받고는 혼자서 습작을 하던 르네는 주변 화랑에 그림을 몇점 보내봤는데 화랑 전시회에 참가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그림 자체만으로 실력을 인정받는다. 굳이 미대를 나오지 않아도 되고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라도 화랑에서 그림만 인정받으면 전시회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스템을 갖고 있다. 마침 우리가 머무는 주의 토요일 날 그 마을에 있는 한 화랑에서 다른 두 화가와 함께 공동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했다.

르네의 그림은 다양한 스타일과 깊이 있는 터치, 강렬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주 우리 마음에 들었다. 남편과 나는 평소에도 그림 보는 것을 즐겨해 화랑을 자주 드나들며 그림을 접해왔는데, 우리 마음에 맞는 그림을 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림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3점의 그림을 사기로 했다. 전시회 전날 베르니사주에 같이 가서 그림을 벽에 붙이고, 함께 정한 제목을 그림 밑에 붙이는 작업도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아주 즐거웠다.

음악의 선율과 미술의 향기가 일주일 내내 우리를 떠나지 않았던 매우 예술적인 휴가였다. 우리가 떠나기 전날 르네는 작년에 그린 그림 중에서 남아있던 그림 하나와 마음에 들지 않아 지붕 밑의 다락방에 처박아 두었던 그림 하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가 산 그림 3개도 일반 가격보다 훨씬 싼 '친구 가격(프랑스에선 이렇게 부른다)'으로 주었는데, 우리는 졸지에 5개의 그림이 새로 생긴 것이다. 파리의 아파트에 이걸 다 걸어놓을 공간이나 있을지? 전시회가 8월15일까지라 이후에 다시 와서 전시회 그림은 찾아가기로 하고, 선물로 받은 그림 2개를 들고 아쉬운 마음으로 르네의 집을 떠났다.

르네는 음악과 미술, 디자이너(독학으로 배운 그의 첫번째 직업이다) 등 재능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따스한 인간미가 나를 감동시켰다. 프랑스에서 인간성으로 나를 감동시킨 사람은 많지 않다. 빠듯한 수입으로 그림도구도 마음대로 살 수 없는 형편이지만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애쓰는 르네는 돈에 굴복하지 않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그동안의 경력으로 볼 때 훨씬 비싼 가격에 그림을 팔 수도 있으련만 저렴한 가격에 그림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돈에 욕심이 없는 르네, 그의 그림이 원하는 대로 파리의 화랑에서도 전시되기를 바란다. 가을이 되면 르네 그림 하나를 들고 다니면서 화랑 출입을 한번 해볼까 한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뭔가로 보답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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