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다해 끝까지…'실천하는' 지도자
여성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사회복지운동 등에서 여전히 현역인 그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한국여성재단의 이사장직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여성들에게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박영숙은 어느 직위든, 어느 곳에서든 책상을 지키는 리더는 아니다. 누구라도 공감하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는 '움직이는 지도자, 실천하는 지도자'이다. 그의 그러한 삶의 모습은 여성정치가로서 평민당 부총재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을 때도 한결같았다. "운동력 있고, 실천하고, 일하는 여성정치인"이었으며, 외로운 고지에서 홀로 깃발을 흔드는 지도자가 아니라 사회활동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많은 동료와 후배, 선배 여성지지자들의 든든한 기반 위에서 생기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하는 그의 성향과는 달리 정치활동의 생명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역동적인 원내 활동, 실질적인 법 개정 특히 가족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끝을 보는 성향을 충분히 발휘했다. 이렇듯 활기 넘치는 정치활동을 했지만 정당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1998년 여성신문과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그런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정당에 여성들이 들어가지 못하면 계속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정치를 순화시키고, 생활과 직결되는 정치, 생태계와의 조화를 생각해야 하는 앞으로의 시대에는 남성들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많이 진출해 강자 위주의 정치구조와 성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치일선에서 떠났는데 정치와 얽혀 있던 인연이 악연으로 작용해 그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었다. 복지부 장관 후임으로 거명될 때 언론이 근거도 없이 그를 경제형 비리인사로 만들어 인생을 헛살았다는 자괴감과 가족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고통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아픈 경험을 더 큰 삶으로 가는 통과의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여성 후배들이 정치인으로서 큰 몫을 해내기를 기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멘토가 되어주기를 희망한다.
박영숙이 어릴 때 자신의 꿈을 '공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 했는데 YWCA는 그런 꿈을 공적으로 시작하게 해준 징검다리였다. Y에서 시작한 그녀의 활동적인 삶은 중단 없는 전진이었으며, 길을 열고 닦는 선각자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삶이었다.
한국에서의 YWCA 활동은 김활란과 김필례가 1922년 베이징 세계YWCA 회의에 참여하여 '기독교 운동의 새로운 비전과 전망'에 눈을 뜨며 사회봉사, 사회운동의 드넓은 바다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 있던 조선에서 Y운동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느끼고 조선에 Y를 독립적으로 설립하기를 열망하여 동분서주한 결과, 독립적인 조선Y를 창설할 수 있었다. 조선Y는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 조혼 및 공창폐지운동 등을 통해 근대조선을 만들어가는 데 큰 몫을 해냈다.
박영숙이 활동했던 1950년대의 Y는 해방되던 시기부터 제2 도약의 시기로 발돋움하고 있던 때였다. 박영숙은 대학시절 열정적으로 YWCA 활동에 참여하였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대학 내 YWCA에 가입을 하게 되었어요. 농촌계몽운동, 여성문맹퇴치운동, 전쟁으로 인한 사회복지사업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어요. 어느 활동을 하든 우직하게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는데, 그 성품 때문에 어른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아요."
학교를 휴학하며 광주에서 학업을 갈망하는 소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정도로 Y 활동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혼신을 기울이며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그를 보고 박 에스더 선생은 Y에서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였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 학교에 남으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박에스더 선생과 대학공부를 마치면 함께 일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터라 대학공부를 마치고 청년부 간사를 거쳐, YWCA에서 유급총무로는 이희호 여사에 이어 두번째로 일하게 되었다. YWCA 활동은 아이 출산 후 육아를 위해 실무직에서 떠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집에만 2년 있었는데, 아이가 서너살이 되었을 때 YWCA가 회원으로 있던 여성단체협의회의 사무처장으로 다시 일하게 되었지요. 저는 Y에서 회장만 안하고 모든 직무를 다 해봤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그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박영숙은 여협의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조직의 체계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Y에서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해왔던 그는 실천적이고 진취적인 여성들의 삶을 위해 활동의 폭을 쇄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사회풍조는 여성단체들에 기부를 하지 않아 재정적으로 매우 힘겨운 시기여서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 시절인 당시에는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도록 강요했는데, 지지성명을 피하면서 지원을 받으려 하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박영숙이 이끄는 여협은 여성들의 권위 신장을 위해 자신들의 행보를 꾸준히 해나갔다. 박영숙의 활동의 특징은 농촌계몽, 문맹퇴치, 전쟁구호활동 등 인본주의적 활동이 큰 가닥을 이루고 있으며, 묘하게도 그 운동 안에는 여성운동, 민주화운동, 환경운동 등이 늘 함께 하였다는 점이다.
여협 활동 이후, 1976년 민중신학자인 남편 안병무 선생이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된 것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민중을 사랑하며 민중들과 호흡하며 민중들의 기쁨과 슬픔을 가슴에 품었던 예수님처럼 민중 사이에서 살고자 했던 안병무의 민주화운동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의 사상, 그의 글, 그의 삶을 사랑했던 동반자인 박영숙은 몸과 마음으로 민중들과 함께 하려는 남편의 고달픈 삶을 존경했다.
"감옥에 있을 때 우리 안 박사님은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가 마음의 고통을 받지 말라고 세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나는 하나도 안 전해줬거든요."
가족들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세간에 떠도는 유언비어 어느 것 하나 전하지 않으면서 그의 마음의 평화를 지켜주려고 했던 박영숙의 배려는 오늘 우리 후배들에게 보이는 평정심과도 통하는 것 같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일어나리라. 그러나 일어난 일들이 태풍처럼 고통스러운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은 지각이 있는 사람들의 실천적 삶일 것이다.
결혼에 대해 특별한 생각도 계획도 없이 일에 열중하던 박영숙이 어설프게 청혼을 해온 안병무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안병무의 명확한 논리와 함께 마음을 감동시키는 설득력 있는 그의 문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영숙의 삶에는 시기마다 중요한 멘토가 있었다. 정인보 선생, 박에스더 선생, 그리고 안병무 박사 이외에도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는 중요한 멘토들이 있었다. 달리 말하면 박영숙은 언제나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기회들이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녀를 성장시키고 그녀가 공적인 어머니가 되는 자양분 역할을 하며, 그것들로 인해 평온하게 살던 그가 찬서리에 젖게 된 것은 편하지 않은 민중을 하나님처럼 섬기던 안병무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남편은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도 갔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사람 덕에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고 사명의식을 터득하게 됐어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넓은 의미의 시민운동을 하게 된 거죠. 정치활동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쓴 말을 하든 달콤한 말을 하든 주의깊게 들으며 가슴에 새기고 선별하여 실천에 옮기는 '경청하는 사람' 박영숙의 인생에서 가장 큰 멘토는 남편 안병무였던 것 같다. 결코 편한 사람이 아니었던 남편 안병무, 그로 인해 민주화운동, 환경운동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미래를 보는 안목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한다.
"남편은 결코 편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신을 전혀 생각지 않고 주변사람을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지요.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찾아왔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안 박사님께 속았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들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했다고 했어요."
사람을 뼛속까지 사랑했던 안병무가 그의 동반자여서 그는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그분은 제가 가장 예쁠 때가 책을 보다가 돋보기를 책 사이에 끼워놓은 걸 볼 때라고 해요. 그만큼 내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그는 오늘도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