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 1주기 기념공연 ‘산불’

이와 같은 평가는 우선 작품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6·25전쟁을 배경으로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이로 인한 서민들의 고통을 여실하게 그림으로써 반전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양민들의 양곡을 가차없이 몰수해 가면서도 노동자·농민의 천국 건설을 장담하는 인민군이나, 이를 토벌하겠다고 대대로 물려받은 대숲을 가차없이 불 지르는 국방군에 대한 민중의 반응은 분노와 좌절뿐이다. 지리산 천황봉에서 원령을 위한 제의행사를 펼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작품이 여전히 우익적이겠지만,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군사정부 치하에서 국방군을 이런 정도나마 비판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 놀랍다는 반응은 그것대로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쓰인 후 한참동안 공연되지 못했던 것은 이념적인 이유보다는 여자들만 출연하는 연극에 대한 극단 내부의 반발 때문이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좌우 이념의 모순은 양씨와 최씨의 갈등으로 대표되는데, 강부자와 권복순의 연기대결이 무대를 압도한다. 그러나 이들의 갈등은 각각의 며느리와 딸, 즉 점례와 사월의 성적 욕구로 인한 충돌을 위한 복선에 불과하다. 과부촌으로 숨어들어온 산사람(규복)으로 인한 삼각관계에서 점례 쪽은 좀더 정신적이고, 사월 쪽은 좀더 육체적인 듯 그려지는 중에, 발각이 두려워 이 둘에게 모두 사육당하고 있다는 산사람의 자의식이 폭발점에 이른다. 사월의 임신에 따른 입덧으로 불안이 고조되다가 그녀가 자살하고 국방군이 대숲에 불을 놓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진 산사람이 사살되면서 이들의 삼각관계는 비극으로 종결된다. 윗세대의 치열한 연기대결 탓인지, 이들의 연기는 다소간 위축되어 보이는 중에 곽명화(점례역)가 지나치게 수동적인 설정으로 모처럼의 호역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해 아쉬웠다. 특히 남자를 공유하자고 덤벼드는 사월의 공격에 대항해 나름대로 버텨보고자 하는 안간힘이 부족해 보였다.

이와 같은 비극적 상황은 희극적 요소를 삽입하는 극작술로 인한 잠시간의 이완으로 인해 더욱 강렬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밥 달라는 양씨의 시아버지와 전쟁통에 정신병자가 된 양씨의 딸 귀덕, 그리고 약방의 감초 같은 쌀례네가 김재건, 이은정, 그리고 조은경의 적역연기로 윤기를 더해준다. 이 연극을 보는 재미 중에는 산불장면을 빼놓을 수 없는데, 박동우의 무대와 함께 박정수의 조명디자인이 실감나는 볼거리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 특히 비행기가 뜨고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불빛으로부터 집 뒤에 있는 대숲에 불이 붙을 때까지의 크레센토는 단연 압권이다.

이 작품이 곧 ‘댄싱 쉐도우’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선보이게 된다니, 원작 공연과 비교하며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