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연극사 일궈온 원로배우 백성희 (2)

‘무용연구소 연구생 모집’.

 이 한장의 광고문구가 그의 일생을 뒤바꿔 놓았다.

 영혼은 묘한 흥분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집안 몰래 시작한 극단의 말단 단원.

 그는 그러나 첫 출연작부터 숨겨진 끼를 맘껏 보여줬다.

아름다운 꿈을 품은 사람은 시들지 않는다. 인생이란 그림은 꿈을 풀어나가는 실타래와 같다. 실현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가슴 속에 품은 꿈이 술술 풀려 나간다. 우리네 나날은 답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로 채워져 있다. 코헬렛 시인의 말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겉으론 같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하나 다르다는 것에서 인생의 신비를 찾을 수 있다. 인생이란 성공과 실패, 눈물과 웃음이 뒤엉켜 묘한 엇박자를 빚어내는, 한마디로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백성희는 그의 지나온 생(生)을 놓고 볼 때 ‘연극’이란 뿌리를 끌어안은 한 그루 거대한 나무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왜 연극을? 그리 오랫동안?” 하고 물을 때마다 “좋아서”라고 간결하게 답한다. 

장차 대갓집의 맏며느리감으로 키워져

그는 조선왕조 마지막 시기에 관리를 지낸 할아버지와 부유한 목재상인 아버지, 부처님처럼 자신을 떠받들던 할머니 손에서 그야말로 귀하게 자랐다. 그런 그가 당시로선 ‘광대’ 취급을 받던 ‘배우’의 길을 택해 무대에 선 것은 가족 모두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빅타무용연구소 문을 두드리다

백성희는 복많은 아이였다. 개명된 부잣집 장녀로 창신소학교(창신초등학교)를 거쳐 동덕여학교(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니던 그에게 미래는 오색찬란한 무지개였다. 그런 그에게 연극은 ‘인생의 신들림’처럼 다가왔다. 뼛속 깊이 사로잡았던 배우라는 직업은 그의 존재 자체가 돼버렸다. 비교적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어른들의 사랑, 신문화 창조에 앞장섰던 여학교의 가르침들이 그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에너지가 돼주었다.

신문화운동의 특징은 개벽사상을 배경으로 낡은 문화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여, 억압적인 인습과 제도를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과 인간관을 정립, 문화혁신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민족의 혼을 귀히 여기던 집안의 가풍과 신문화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학교의 교육이념이 백성희의 내면에 자연스레 배어들었다. 

첫 작품 ‘심청전’ 뺑덕어멈으로 데뷔

자녀를 낳기 위해 분가를 감행할 정도로 결단력 있는 할머니, 자녀의 민족혼이 흐려질까 염려해 조선인들만 사는 동네로 과감히 이사했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백성희는 자신의 꿈이 어른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줄지를 헤아리고도 남았다.

그의 학창 시절 초반부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트리오’로 불리던 소학교 시절의 이금련, 이정옥, 이어순이(백성희)는 나란히 소학교 옆에 있던 동덕여학교에 진학했다. 이금련이 여학교 2학년 때 사망하기까지 또래의 우정을 나누며 꿈 많은 시절을 보냈다. 한 잡지 광고를 보기 전까지 그의 일상은 여느 또래들과 다를 바 없었다.

‘빅타 무용연구소 연구생 모집광고’란 작은 광고문구를 우연히 접한 순간 그의 영혼은 묘한 흥분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외삼촌이 건네주었던 ‘다카라츠카 소녀가극단’의 월간지를 통해서였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연구소를 찾아가 고전무용, 발레, 음악, 발성법 등을 배우며  가극배우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가극단의 말단 단원이 됐다. 배우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천한 직업이라며 노발대발할 집안 어른들의 분노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어순이가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집안에 수치를 가져다 줄 세상으로 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예술적 끼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몰래 연극을 하며 학교와 집, 그리고 무대를 가슴 졸이며 오갔다. 정식으로 빅타극단 단원이 되면서 등교해야 할 시간에 극단으로 가 연습을 했고, 조퇴를 하며 무대에 섰다. 

첫 데뷔작은 가극 심청전. 거기서 그는 뺑덕어멈 역을 맡았다. 서울내기 유복한 집안의 규수가 호들갑스럽고 야멸찬 중년의 뺑덕어멈 역을 거뜬히 소화해내 연출자 서항석을 놀라게 했다. 그는 말단 단원이 되면서 본명을 숨기고 이화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첫 무대에서 배우로서 자질을 충분히 발휘한 그는 빅타가극단이 북선(북조선)지방과 만주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날 때 가출을 해 연극단에 합류했다. 밤새도록 눈물만 흘리고 난 뒤 편지 한장 남기지 않고 집을 나왔다. 

가출뒤 만주공연…집에선 죽은줄 알아

소리 없이 사라진 어순이가 몇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집안에서는 죽은 줄 알고 장사까지 치렀다.

약속된 미래를 훌훌 벗어던지고 앞날이 불투명한 고난의 길로 들어선 백성희에게 연극은 마음의 고향이자 삶의 에너지이며, 그리고 가족이었다. 훗날 반도가극단이 된 빅타가극단은 쇼 공연에 치우쳤던 다른 가극단과는 달리 순수 무대예술운동을 하던 단체였다. 그래서 고전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가극운동을 펼쳤다. 각색과 연출은 백성희의 인생 지도자가 된 서항석이 맡았다. 

백성희는 전국에 이어 북만주까지 순회공연을 다니며 <심청전>, <에밀레종>, <장화홍련전> 등을 연기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가족들은 걱정과 긴장에 휩싸였다. 며칠을 술로 고심하던 아버지에게 “나는 연극 말고는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딸의 대답은 비수로 꽂혔다. 격노한 아버지의 “나가!”라는 불호령은 백성희의 가슴 또한 찢어놓았다. 사흘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못마시고 탈진해가는 그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어머니와 할머니가 중재에 나섰다. 아버지는 한발 물러섰다.

“이제 너는 내 딸이 아니다. 할 테면 해라. 하지만 흐지부지하면 그때는 내 딸이 아닌 것은 고사하고 사람도 아니다”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의 딸이기를 포기하고 연극을 택한 그는 오늘에야 “아버지, 저 연극만 하며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