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가족주의
그리고 프라이버시

지난 4월 국회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을 의결했다. 이 법은 지난 2005년 3월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에 따라 기존의 호적을 대체할 새로운 국민등록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새로운 국민등록에 관한 법은 양성평등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지향하기 위해 탄생했지만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구현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젠더적 관점이 ‘프라이버시’를 선호하고, ‘가족주의’를 경계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프라이버시가 존중돼야만 가족과 여성 개인의 다양한 삶의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것을 비난할 권리가 없음이 정당화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족주의는 남녀간 혼인과 출산, 이혼을 경험하지 않은 ‘정상가족’을 중요시한다. 가족의 가치를 위해선 개인을 희생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가족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 때로는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 따라서 젠더적 관점은 다양한 가족형태와 여성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가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은 국가가 국민 개인의 신분을 포함한 ‘정체성’을 기록하고 호명하는 방식을 통해 여전히 가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이는 비단 법의 제명이 ‘가족관계’로 이름 지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법의 목적(제1조)을 보면 ‘국민의 출생, 혼인, 사망 등 가족관계의 발생 및 변동사항에 관한 등록과 증명 관련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국민등록의 이유가 개인을 중심에 놓고 관련 정보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출생, 혼인, 사망으로 인한 가족관계의 변동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는 곧 증명서의 종류 및 기록사항에 대한 규정(제15조)에서 가족관계 증명서가 가장 일차적인 증명서가 되고, 개인에 대한 기본 정보를 담은 증명서는 두번째 오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나아가 혼인신고 및 이혼신고를 할 때 본인 이외 부모 이름을 기록해야 하는 필요성도 생긴다. 혼인 및 이혼 당사자가 자기결정권을 가진 성인임에도, 또 이미 기본증명에 부모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 이름까지 신고해야 하는 것은 국민등록의 초점이 개인이 아니라 가족관계의 변동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민등록 방식은 ‘1인 가족부’ 개념에 가까운 느낌이다. 분류 단위와 증명 형식만 개인일 뿐 아직 우리 사회에서 개인과 프라이버시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법의 실효성 측면에서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변화된 국민등록 및 증명 방식에 대해 사회가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있다. 새로운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학교 및 기업이 기본증명 외에 가족증명, 혼인증명 등 과거의 호적과 같은 정보를 요구한다면 법 제정의 긍정적 의미는 상실된다. 신입사원 면접 때 혼인, 출산 등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업무 능력과 관계가 없는 혼인 및 가족에 관한 증명 또한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새 법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인식변화를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법의 취지에 맞는 새로운 규율 혹은 지침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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