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선 ‘맑은 슬픔’
곳곳에 비를 맞고 있는 전시 포스터 속의 인물은 레닌임에 분명하다. 연단에서 붉은 깃발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가치를 설파하던 그가 마치 쇠라의 점묘화처럼 색과 점의 군집으로 성글게 묘사되었다. 역시나 거꾸로 뒤집힌 상태라 바람이라도 훅 불면 붉고 푸른 빗물이 되어 뚝뚝 쏟아질 것만 같다.
그런데 왜 거꾸로 거는 걸까. 그에 따르면 거꾸로 걸린 그림은 상식적이고 관성적인 이미지 인식을 방해한다. 더 찬찬히 그림 표면에 집중하도록 해 형상 이전에 물감과 붓질의 표현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는 것. 하지만 기어코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고 싶은 우리는 고개를 뒤집고 그림을 읽느라 목이 좀 아프다. 그림들은 의외로 친절해서 약간의 노고만 보태면 형상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바셀리츠는 동독 출신 미술가로서 동베를린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정치적 미성숙’이라는 이유로 제명당하고 서베를린으로 망명했다. 작가는 동독에서 보고 자란 이른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시각적 기억을 통해 더듬어간다. 체제의 기록미술을 기억을 통해 되짚어가는 그의 화폭은 묽어지고 성글어지고 가벼워졌다.
우선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화가가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만난다. 덮어쓴 군용외투가 더욱 춥게 보인다. 추위보다 곤란한 것은 그가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는 사실. 캔버스 한가운데 자신의 그림자만 덩그러니 드리워져 있다. 이전이라면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면 되었을 테지만 이젠 텅 빈 자유에로 던져진 화가는 자유 안에서 좌절한다. 바셀리츠는 여전히 그린다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전시는 레닌, 스탈린 등 정치적 인물들을 다시 그린 ‘역사의 초상’, 구동독과 러시아에서 살던 사람들을 보여주는 ‘사람 일상 삶’, 원작을 토대로 이미지의 변용을 시도한 ‘이미지의 변주’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멀리 전투기 아래 피 흘리며 나뒹구는 남자를 그린 ‘파시스트 비행기가 지나갔다’, 어느 자작나무 숲에서 막간 시간 동안 서로 포개져 잠든 전사들을 그린 ‘나이팅게일의 시간’, ‘전선에서 온 편지’를 돌려 읽으며 불안을 나누고 위로하는 민중들의 삶의 순간들이 담담하고 맑은 슬픔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바셀리츠가 그린 몇 점의 레닌은 마치 레닌의 환생이 러시아 몰락 이후를 겪어내고 있는 것처럼 쓸쓸하다. 더 이상 강철의 전사가 아니라 벌거벗은 채 실존과 대면하고 있는 인간 레닌. ‘레닌에게 파견된 사절단’을 접견하고 있는 그의 벗은 몸과 주름살과 비루한 수염은 오히려 니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사회주의 버전의 ‘성모자상’이라 할 ‘일리치의 전구’는 종교의 상징이었던 빛을 전구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발전된 사회의 상징인 전구, 그 동력이 되었던 정치적 힘이 종교의 빛을 대체한다.
러시안 페인팅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린 한 시대의 열망과 그 열망이 배태한 이미지’에 대한 그림이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작들의 이상화되고 경직된 화면들을 찰나적인 붓질과 맑은 물감으로 흐르는 듯 다시 그렸다. 단단하게 채워진 정치 이데올로기 그림들을 파편화해서 스케치처럼 가볍게 하고, 그 안에 빈 공간이 숨을 쉬도록 했다. 체제 옹호 그림들에 대한 조롱이나 패러디이기보다 그저 기억이라는 노스탤지어를 쓸쓸하게 따라가고 있는 듯했다.
더욱 거세진 빗줄기를 바라보며 인간의 의지나 혁명, 역사의 흐름은 중력의 법칙에 역방향일까, 순방향일까 생각해보지만 이번엔 목 대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려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