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말하면 대응방식의 유연함과 경직성이 승패를 갈랐다고 할 수 있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병 치유를 위해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대처 식의 중도 노선을 택하는 유연성을 보인 반면, 루아얄 후보는 프랑스병의 원인이 된 사회당의 정책을 더욱 고수하는 경직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28년 전 대처 등장 이전만 해도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구호를 외친, 사실상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체제를 구가하는 나라였다. 근로소득 최고세율이 83%까지 올랐고, 노동조합이 정부와 정권을 쥐고 흔들었다. 그 결과 경제는 무너졌고, 기업은 도산했다. 1976년에 영국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대처는 79년 집권하자마자 ‘영국병’ 치유를 위해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에 메스를 가했다, 세금을 줄이고, 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각종 복지혜택을 축소했다. 교육과 의료 등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으로 대처는 영국의 경제 부흥을 이룩해냈다. 후임인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은 이런 대처 식 리더십의 산물이었다.
메르켈 역시 파업과 저성장, 고실업이란 고질병으로 허덕이는 독일의 경제를 살려달라는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실업도 괜찮은 직업’이라는 유행어가 퍼질 정도로 이른바 독일병이 만연했다. 연금과 실업급여가 보장되니 국민들은 일을 하기 싫어했고, 자연히 국가경쟁력은 추락했다. 경제성장률이 1970~90년 2.5%에서 90년대 1.4%, 2000년대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실업률은 10% 이상으로 치솟았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11월 취임하자마자 과감히 연금과 실업급여를 줄이는 개혁적인 방법을 택했다. 대처처럼 신자유쥬의 노선을 택했다. 그래서 메르켈은 ‘독일의 대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최대 이슈는 ‘누가 프랑스병을 치유해낼 것인가’였다. 프랑스는 저성장과 고실업, 짧은 근로시간과 고임금 등으로 국제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과도한 복지비용도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세계 5위권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1인당 GDP는 15위권으로 밀려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남성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오히려 ‘프랑스의 대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영미식 시장경제 도입과 ‘작은 정부’를 내걸었으며, 재산세와 상속세를 내리고, 노동 유연성을 높일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 더 타임스지가 “프랑스 국민들이 사르코지를 뽑은 것은 1979년 영국 국민이 마거릿 대처를 총리로 뽑은 것에 비견되는 사건”이라고 분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루아얄은 국민들의 바람이 기존 체제 안주나 강화가 아닌 ‘변화’였음에도 불구, 여전히 연금 강화와 사회적 보호라는 좌파 구호를 앞세웠다. 루아얄은 대선운동에 공식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 범죄자를 군대에 보내자고 주장하는 등 ‘법과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세계 유일의 주 35시간 노동제를 비판하면서 프랑스판 ‘제3의 길’을 제시, 중도와 보수층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대선전이 본격화되자 루아얄은 전통적인 좌파 노선으로 회귀해버렸다.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꿈을 안고 뛰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같은 여성인 루아얄과 거리를 뒀고,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같은 여성인 루아얄보다 사르코지를 지원했다. 이들은 루아얄에게서 같은 여성으로서의 동질감보다 루아얄이 이끄는 사회당의 시대착오적인 경직성에 이질감을 느꼈던 셈이다. 여성리더로서의 동질성은 생물학적으로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조류를 집권으로 연결시키는 유연함과 통찰력, 그리고 결단력과 소신 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된 미첼 바첼레트(55)의 삶은 극좌파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좌파이면서도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고수하면서 베네수엘라 등 반미 좌익노선 국가와 미국 사이에서 ‘균형잡기’를 할 줄 아는 ‘유연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꿈을 안고 뛰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나 한명숙 전 총리가 음미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여성 대선 후보가 봐야할 루아얄의 패배요인 5
첫째, 이미지 정치에는 한계가 있다.루아얄은 자신의 외모와 여성이란 이미지를 한껏 강조했고 블로그와 인터넷 사이트도 활발히 이용해 젊은 감각을 보여줬다. 그러나 루아얄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프랑스에 핵잠수함이 몇척 있는지도 몰랐으며, 지난 1월 중국을 방문해서는 ‘브라부르(bravoure·용감 또는 대담)’란 단어 대신 ‘브라비튀드(bravitude)’라는 엉뚱한 단어를 써서 망신을 당했다. 이미지 정치는 실력이 동반될 때 빛을 발한다.
둘째, 외교·안보 잘 모르면 대통령 자질 의심받는다.
루아얄은 중국 방문 당시 “중국의 법체계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발언을 해 “사형제도를 실시하는 국가의 법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게 있느냐”는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캐나다 퀘벡주의 독립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정간섭성 발언을 하는 등 국가정책의 핵심분야라고 할 수 있는 외교·안보분야에 대해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셋째, 여성 후보의 적은 여성 유권자?
루아얄은 1차 투표에서 여성 유권자 중 28%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사르코지는 32%를 얻었다. 여성이 사르코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흔히 ‘여성 후보의 적은 여성 유권자’라는 말이 있다. 일반 여성들이나 나이든 보수세대는 ‘권력’과 ‘남성다움’을 연관 짓는 경향이 강해 남성 후보를 선호하고,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인 미를 강조하는 여성 후보에게 반감을 느낀다.
넷째, 일관성 없는 정책은 자살행위다.
루아얄은 프랑스판 ‘제3의 길’을 제시, 중도와 보수층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사르코지와의 지지율 격차가 계속 벌어지자 차별화를 위해 좌파 노선으로 회귀해버렸다. 한편,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100가지가 넘는 공약을 내놓았지만, 재원 확보방법 등 구체적 계획이 결여된 공약을 발표함으로써 공약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
다섯째, 제3세력과 연대를 이뤄야 한다.
루아얄의 또 다른 패인은 결선투표에서 중도파인 프랑스민주연합(UDF) 바이루의 표를 끌어오는 데 끝내 실패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3당 합당이나, DJP 연합, 후보 단일화 등 제3세력과의 연대가 필승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