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성역할·폭력적 이혼문화 ‘지고’
‘이혼 이후 성공적 삶’ 새 담론 ‘뜬다’
이혼경험 지지집단 찾기가 앞으로 과제

어쩌면 우리는 ‘이혼 만능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대다수 여성들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결혼과 가족관계를 유지해왔다면, 오늘날에는 개인의 행복 추구를 ‘권리’로 인식하게 되면서 이혼을 대안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 ‘늘었다’고 해서 이혼이 ‘쉽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여전히 이혼여성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렸겠지, 여자가 저렇게 드세니까 이혼당한 거 아냐”라는 뒷 담화를 들어야 하고, 이혼남성은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가정 하나 관리를 못하느냐”는 힐난을 감수해야 한다. 이혼은 남성에겐 승진 차별을, 여성에겐 빈곤화를 가져다주고, 이러한 고정된 성역할은 ‘비정상’이라는 낙인까지 씌운다.

이혼 당사자들이 ‘성공적으로 이혼하기’를 새로운 이혼담론으로 제시하는 이유다. 3월28일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이혼정책팀이 주최한 ‘새로운 이혼담론 만들기’ 토론회에서 이혼여성들이 쏟아낸 이야기는 ‘보수적인 이혼문화’가 이혼 이후의 삶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짓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이혼하고 나면 경제적인 어려움이 제일 크죠.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신적인 독립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혼이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흘깃거리거나, 아이들에게 ‘불쌍하다’며 쯧쯧거릴 때 눈물 대신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긍정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주위에는 이혼한 후에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너무 답답하죠.”(A씨·49세·1987년 이혼)

“이혼하자니까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가정도 못 지키는 무능력하고 남자답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보다 평생 서로 미워하면서 사는 게 낫다고. 결국 이혼하는 데 7년이나 걸렸어요. 그런데 차라리 그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이혼할 때는 남편하고만 싸우면 됐는데, 이혼하고 나니까 세상에 보이지 않는 적이 너무 많아졌거든요.”(B씨·43세·2004년 이혼)

B씨는 이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후 관련 책도 찾아보고, 법률 자문도 받고, 여성단체를 통해 이혼 경험자로부터 조언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운 셈이다. 하지만 정작 이혼한 이후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은 배울 수 없었다.

B씨는 “나는 괜찮은데 오히려 사람들이 이혼을 곧 상처라고 생각해서 얘기 꺼내는 것 자체를 꺼린다. 가족들조차 아예 입을 막아버릴 정도”라면서 “자랑까지는 아니어도 ‘나 결혼했어’처럼 ‘나 이혼했어’를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혼담론이 자연스러워지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금기 언어였던 ‘성’이 자유롭게 된 과정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변화순 한국여성개발원 여성정책전략센터 소장은 “이혼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은 호주제 폐지 이후 가족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라면서 “지금부터라도 서로의 이혼 경험을 나눔으로써 지지집단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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