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부인들] 감춘듯 드러낸듯 ‘안방의 히든카드’…‘두얼굴’로 추락

오빠 친구와 타오른 ‘청춘의 불꽃’

노 전 대통령에게 ‘영국 신사’ 별명 지어줘

김옥숙 여사는 1935년 8월11일 아버지 김영한과 어머니 홍무경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경북 청송 출신으로 청도국(초)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 대구로 이사, 대구국교·경북여중을 거쳐 경북대 가정학과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 중퇴했다. 그리곤 경북여고 시절에 알게 된 셋째오빠 김복동씨의 친구인 노태우와 결혼했다. 처녀 시절 김 여사는 대구의 모 미장원에서 미스 코리아 대회 출전을 권할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연애 시절 김 여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영국신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말이 없는 데다 신중하고 믿음직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특히 여자를 겸손하고 정중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59년 5월31일, 대구 문화예식장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김 여사는 학창시절 몸이 아주 약해 자주 결석을 하곤 했었는데 테니스를 치기 시작하면서부터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부부 나이를 합해 100세가 넘는 ‘100세 테니스 대회’에서 3등을 할 정도의 실력파다.

 퍼스트레이디 감추기 작전, 특명!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노 전 대통령만큼 애처가는 드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군인 시절부터 웬만한 파티나 이·취임식장에는 항상 부부동반했고, 전역 후 대통령 특사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순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민정당 대표위원이 된 이후에는 김 여사와 나란히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김 여사는 87년 6월 남편이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던 날에도 단상에 앉지 않았다. 대선 기간 중 전국을 수차례 순회, 줄잡아 10만명 이상의 유권자를 만났지만 그녀는 매스컴과의 공식 인터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이는 노태우 선거팀의 홍보전략이기도 했다. 전임 이순자 여사의 적극적 활동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반면교사로 삼아 ‘퍼스트레이디 감추기 작전’을 편 것이다.

88년 2월25일 6공화국 대통령 영부인 자리에 오른 김 여사는 대선 때의 잠행 스타일을 5년 내내 유지했다. 그녀는 재임 중 모든 행사를 비밀에 부쳤고, 일절 대중매체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지 않았고, 모임에서의 발언도 극구 삼갔다. 20여년간 소년소녀가장 10가구와 결연관계를 맺고 남몰래 인간적 금전적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퇴임 직전에 밝혀졌을 뿐이다. 보좌진의 주요 미션이 ‘영부인의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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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1 면담을 선호한 영부인

민자당 여성의원들 설득 영유아보호법 발의 힘써

김 여사는 비공식적 면담 등을 통해 시중의 비판적 여론을 청취했다. 박영훈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은 “영부인은 대부분 1대 1 면담을 했고, O 총장이나 O 교수 댁에 직접 차를 보내 청와대로 모셔왔으며 또 면담시간도 그분들의 일정에 맞춰 조정했다”고 전한다. 

김 여사는 90년도에 민자당 여성의원들을 설득해 영유아보호법이 발의되도록 했으며, 노동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장애인 출신 이채필 사무관을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으로 채용하도록 힘썼다. 한편, 식기에 관심이 많아 식기 디자이너를 청와대로 불러 직접 디자인을 주문하기도 했다.

안방 히든 파워…외사촌 박철언 전 정무장관

6공 황태자로, 청와대 친인척 모임 수시로

김 여사는 영향력 행사 면에서는 역대 어느 영부인 못지않은 파워를 구사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지고 있다. 그녀의 히든파워는 6공 황태자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부상과 함께 시작됐다. 정권을 잡은 후 김 여사는 외사촌동생 박 전 장관을 청와대 안방으로 불러 수시로 정국운영 방향을 논의하곤 했다. 박 전 장관이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지적한 대로 김 여사는 치과의사 김영순씨를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오빠 김복동씨와 여동생의 남편인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을 14대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 김 여사는 남편의 재임 시절 치른 두차례 총선 때 민정당, 민자당 공천에 직접 개입했다. 6공 후계구도에도 적극 참여했다. 초기에는 반 김영삼 편에 섰으나 나중에는 “선거 후에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YS를 지원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며 주변에 YS를 도우라고 설득하는 등 정치 전반에 걸쳐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난다. 김 여사의 친인척들은 ‘청와대 친인척 모임’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초기 6공 정부에서 권력의 주류를 이루었다.

 

청와대에 초청한 88올림픽 조직위원회 임원부인들과 함께.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dosage for cialis site cialis prescription do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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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 백담사 유배 이후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이웃사촌이면서도 남보다 못해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다. 우리가 오물통에 빠진 격인데 건져주려면 오물을 조금도 안묻힐 수 있겠는가.”

김 여사는 5공 청산의 과정에서 전임 영부인 이 여사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88년 10월14일, 이 여사가 새세대육영회 회장직을 사퇴한 날, 두 사람은 1시간40분이 넘게 전화통화를 했다. 이 여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와달라“면서도 ”우리를 더 이상 다치게 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하지만 상황은 김 여사가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갔고, 이 여사는 백담사로 유배를 가야 했다.

91년 10월1일, 김 여사가 이 여사의 어머니 이봉년씨의 빈소에 영부인 자격으로 직접 문상을 하면서 두 사람은 3년8개월여 만에 다시 만났지만…. 현재 두 집안은 걸어서 1~2분 거리에 살고 있어도 여전히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케네디’ 꿈꾼 장남

정계 진출 좌절로 큰 아픔

93년 2월25일, 손명순 여사에게 영부인의 바통을 넘긴 김 여사는 퇴임 2년 후에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남편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검찰청을 드나들다 급기야 구속되었다. 김 여사에게는 ‘두 얼굴의 영부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김 여사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장남(노재헌)의 출마 좌절. 국제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는 노재헌씨는 당시 국회의장 비서관 등을 거치면서 정치수업을 쌓는 등 한국의 케네디를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비자금 사건으로 “아버지의 죄는 아들의 죄”라며 정계 진출을 포기해야 했다.

김옥숙 여사 일대기

1935년 8월 11일, 경북 청송에서 교육자였던 김영한 씨와 홍무경 여사 사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남

1952년 경북여고 1학년 때 친오빠 김복동 씨의 동기인 노태우 육군사관학교 후보생 만남

1959년 5월 31일, 대구 문화예식장에서 결혼

1961년 3월 31일, 딸(노소영) 출산

1965년 11월 3일, 아들(노재헌) 출산

1987년 6월, 남편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 선언’ 발표

 12월 26일,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제6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

 9월 13일, 딸 소영 씨가 당시 선경그룹(현 SK) 고 최종현 회장의 아들 최태현(현 SK 회장)씨와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 올림

1990년 2월, 노태우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함께 3당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 출범시킴

 6월 20일, 아들 재헌 씨가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의 외동딸 정화 양과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 올림

1993년 2월, 노태우 대통령 퇴임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기간 중 비자금 모금 문제 드러나면서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혐의로 검찰에 구속됨

1996년 4월 17일,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8억원 선고받음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사면조치로 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복권됨

참고문헌

인터뷰

- 박영훈, 문동우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

언론보도·기사

-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2006년 10월 26일)

- <우먼센스> 1996년 12월호

- <주간조선> 1995년 11월 23일      

- <여성중앙> 1993년 4월호

-<여원> 1993년 2월호         

- <가정조선> 1991년 11월호 

-<신동아> 1988년 4월호       

- <여성동아> 1988년 1월호 

도서

-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박철언, 랜덤하우스중앙, 2005

- 대통령가의 사람들, 오경환, 도리, 2003

- 영부인론, 함성득, 나남출판, 2001

-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의한 유형화 연구, 최고은, 고려대 대학원 행정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0

- 한국 영부인론: 대통령 부인의 유형과 역할 연구(이승희, 제20회 한국여성정치논단: 한국영부인론, 정치인 아내의 바람직한 역할 및 위상, 한국여성정치연구소, 1997년 7월 16일)

- 용기있는 보통사람 노태우, 이경남, 을유문화사, 1987

- 3김과 노태우, 오효진, 세종출판공사, 1987

- 대통령 후보들, 조재구, 성정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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