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으론‘매력적’, 공인으로선 ‘낙제점’
국민과 커뮤니케이션 역부족
역대 영부인중 가장 인기없어

개인적으로 이순자 여사는 군인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하면서, 재테크나 자식 교육에도 탁월했던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이라는 공인으로서의 이 여사에 대한 평가 점수는 낮다. 역대 9명의 대통령 부인들 중 가장 인기가 없는 퍼스트 레이디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여사가 영부인으로서 했던 활동이 역대 다른 영부인에 비해 크게 뒤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이 여사가 ‘명품족’이었던 것도 아니다.  이 여사가 열정을 쏟았던 새세대 육영재단과 심장재단은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회에 일정부분 공헌하는 공익단체로 남아있다. 

훌륭한 영부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대정신’과 ‘시대변화’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또 그 변화와 정신에 맞춰 국민들과 소통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 여사의 경우 본인의 표현대로 ‘아무리 잘 하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국민들이 원하는 영부인상에 자기를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에 국민이 적응해주기를 바랐다. 나라의 장래를 책임진 대통령의 배우자라기보다는 그저 예쁘고 똑똑한 한 남자의 부인으로만 남으려고 했던 데서 이 여사의 불행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사는 1980년 보안사령관 부인이 되면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했는데 첫 인터뷰에서부터 예쁜 옷에 카르티에 명품시계를 차고 나왔다. 공식행사에 입고 나온 이 여사의 화려한 색상의 의상은 컬러 TV를 통해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국민들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채 앉거나’ ‘대통령과 나란히 손을 흔들고 나타나는’ 영부인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영부인에게도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인의식이 부족했던 것도 이 여사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대목이다. 장영자 사건을 위시한 5공화국 내의 수많은 친인척비리는 이 여사의 평판에 악재가 되었다. 장영자씨는 친정쪽 작은아버지의 처제였다. 이 여사의 막내동생인 이창석씨가 4년 만에 과장에서 부사장(동양철관)으로 뛰어올랐고, 이 여사의 제부들도 80년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 전 대통령 내외는 ‘가까운 사람한테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자’는 것을 좌우명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두 부부의 특성은 자연인으로서는 덕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된다. 이 여사는 이 점을 깨우쳤어야 했다.

광주에서부터 출발한 5공 정부의 폭력성과 부정적인 이미지도 이 여사에게는 불리한 요소였다. 이런 저런 이유가 겹쳐 이 여사는 실제 본인이 갖춘 자질이나 활동보다 훨씬 평가절하되어 있다. 이 점이 이 여사로서는 분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이 여사는 백담사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매일 5시간에서 10시간씩 썼다고 한다. 모두 세권으로 첫째권은 전두환씨를 만나 대통령직에 오를 때까지이고, 둘째권은 청와대 생활, 셋째권은 청와대를 나온 뒤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여사의 70세 생일 때에 맞춰 출간된다고 하는 자서전에서 이제는 국민과 소통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우친, 공인 의식이 갖춰진 ‘깊은 장맛이 우러나오는 성숙된’ 전직 영부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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