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흘린 뒤 먹는 밥 ‘꿀맛’

오랜만에 몸을 풀었다. 올해 농사의 첫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땀을 쏙 빼고 나니 정신이 맑아진다. 육체노동의 뒤끝은 언제나 개운하다. 몸과 마음을 모두 정화시켜주니 기분이 최고다.

오늘은 오전 내내 뒷마당 두릅나무 뿌리와 씨름을 했다. 집 뒷마당은 두릅밭이었다. 집 짓던 해 뒷산에서 두릅 몇가지를 잘라 심어놓은 것이 10여년 동안 엄청나게 퍼져 뒷마당은 온통 두릅이 덮게 되었다. 그동안 봄마다 두릅 따먹는 재미가 적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나는 올해 그 재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와 자두나무가 왕성하게 번지는 두릅 때문에 운신을 못할뿐더러, 봄이면 담 밑에 좍 퍼져 돋아나는 머위 등 산나물이 두릅나무 가시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워져 그대로 쇠어버리곤 했다. 또한 두릅이 10여년 동안 키가 커버려 채취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두릅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그 자리에 감자와 고구마를 심기로 하였다. 지난 설 때 조카들이 와서 굵은 나무는 대충 베어내주었는데 뿌리가 엄청나게 땅 밑을 점령하고 있어서 밭을 갈자면 그 뿌리를 제거해야만 했다. 나무는 위로 나온 만큼 땅 속에 뿌리가 있다고 보면 된다. 10년 동안 얽히고 설킨 뿌리가 얼마나 굉장한지 도끼, 톱, 호미, 낫, 모든 연장을 동원하여 오전 내내 씨름하고 나니 어깨 허리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눈앞이 노랗다. 

오전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고 점심 맛있게 먹고 다시 밭으로 나갔다. 오후 작업은 배나무밭이다. 밭 한쪽에 배나무가 열 그루 남짓 있는 미니 과수원이다. 일단 위로 솟은 새 가지들 쳐주고, 나무 둘레 파고, 퇴비를 넣기 위해 20㎏짜리 퇴비 10부대를 들었다 놓았다, 뒹굴고 엎어지고, 땀 범벅 흙 범벅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저녁때다. 팔의 힘은 쭉 빠지고 허리가 뻐근하다.

“시간은 잘도 가네….”

“어이! 우리 배추 좀 뽑아다 먹어….”

영희 엄마가 손짓을 한다. 집 뒤로 돌아가보니 아직도 뽑지 않은 배추가 밭 가득하다. 지난 가을, 여름에 하도 가물어 김장 때 배춧값이 잘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였다. 김장 때가 되면 귀할 줄만 알았던 배추가 쏟아져나오고 장에서는 배추 한 포기가 500원에 팔렸다. 전해보다도 값이 폭락한 것이다. 이유는 고추농사가 가뭄으로 병이 번져 작살나자 고춧대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모두 배추를 심었다는 것이다. 쏟아져나오는 배추로 배춧값은 폭락하고 일손이 모자라 항상 동동거리던 영희 엄마는 뽑지도 못하고 그대로 묵힌 것이다. 그나마 겨울이 따뜻해 얼지 않고 지금 뽑아먹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김장김치가 좀 물린다 싶었는데 한 소쿠리 얻어다 물에 담가 씻어 놓으니 노란 배춧속이 여간 먹음직스러운 게 아니다. 절이지도 않고 죽죽 찢어 멸치액젓에 갖은 양념하여 설설 버무려 놓고 밥 한 사발 수북이 해치우고 나니 그 꿀맛에 지친 몸이 금세 살아난다.

“영희 엄마 덕에 잘 먹기는 하는데… 조그만 이가 쩔쩔매고 다니던 걸 생각하니 짠하네….”

겉절이 한 양푼 바닥내고 일어서려니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1, 2월 방안애서 컴퓨터 하고만 노느라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갑자기 시동 걸어 작동하니 준비 안된 관절들이 놀란 모양이다. 겨울 내내 밥값 못하고 빈둥거리는 것이 죄짓는 것만 같았는데 이제부터는 땀 흘리고 밥 먹게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깨는 결리고 허리는 아파도 머릿속은 맑고 몸도 가벼워 훨훨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른 들녘 이곳저곳에서는 봄 파종 앞두고 고춧대 잘라내 태우는 소리가 탁탁 번지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다. 해질녘 들로 퍼지는 이 냄새, 이 소리…. 내가 소원하는 삶,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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