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부인들 (4)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내조 ‘가슴 찡’
공무원 아내로 외길 한결같은 그림자 내조
보통주부 같은 영부인…숨가쁜 역사엔 ‘응어리’

양가 한학자 조부들이 짝지어줘

남편 없이 8년 시집살이

최규하 10대 대통령(1979년 12월~1980년 8월) 부인 홍기 여사는 한일병합 6년 후인 1916년에 충북 충주에서 한학자 홍병순씨와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성균관 박사인 최규하의 할아버지 최재민씨와 교류하던 한학자인 홍기 할아버지가 중매하여 19살 되던 1935년에 연하의 최규하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홍기 여사는 한학자 집안의 후손답게 웃어른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며 교양을 쌓았고, 정규 교육기관에는 다니지 않았다.

결혼 당시 최규하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4학년이었고, 졸업 후 바로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유학한 다음 잠시 대구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공무원 교육기관 성격의 만주 대동학원에서 정치행정학을 공부한 후 1943년 귀향했다. 이 기간 홍기는 원주 시댁에서 지냈으며 장남 홍윤을 결혼 10년 만인 1945년에 낳았다. 남편이 집을 비워도 참한 며느리로서 인내하며 시부모님을 잘 모시는 행실은 유교문화의 덕분이었다.

 

최장기 외교공무원 아내로 외길

공직자 부인상 개척

홍기 여사의 일생은 1945년부터 1년간 남편이 서울대 교수를 한 기간 외에는 공무원의 아내로서 외길을 걸어온 삶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35살에 외무부 통상국장, 다음해에 주일대표부 총영사, 43세에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한 후 외무부 차관이 되고, 51세에 외무부 장관이 될 때까지 외교 정통관료로서 고속 승진을 하고 직업공무원의 길을 성실히 걸어 대통령이 된 첫 국가원수다. 직위의 변화에 따라 홍기 여사의 역할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을 법한데, 언제나 그림자 내조에 머물렀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현직 대통령 자제들의 비리문제 연루를 보고 “대통령은 집안 단속과 비서 단속을 잘 해야 되는데…” 하며 안타까워한 대목에서 보듯 원칙에 있어서는 완고함을 굽히지 않는 그의 성격이 아내에 대해서도 얼마나 엄격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걸스카우트 연맹 임원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모습.
▲ 한국걸스카우트 연맹 임원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모습.
양지회 총무 맡아 육영수 여사와

4년간 보조 맞추기도

남편의 주일대표부 근무 기간 8년 동안에 일본어를 구사하게 되고, 주 말레이시아 대사 부인으로 있을 때는 영어를 학습했으며, 가든 리셉션을 할 때는 대사 부인으로서 즐겁게 안주인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불행히도 말레이시아 시절에 허리를 다쳐 163㎝의 훤출한 키가 줄어드는가 하면, 180m 거구의 최 전 대통령 옆에 서면 상대적으로 키가 아주 작은 여인이란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67년부터 4년간 수석장관(외무부)의 부인이 맡게 돼 있는 양지회 총무를 맡아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활동한 것이 다소 공적 활동에 체계적으로 참여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남편 속옷 직접 빨고 손수 식탁 차리고

김장 담갔던 보통주부 영부인

구한말에 태어나 2004년 7월까지 89년을 살다간 홍 부인의 생활은 현모양처와 여필종부란 말로 표현되는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부덕(婦德)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평이 적절하다.

홍 여사는 청와대 시절을 제외하고 최 전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지낼 때까지, 그리고 퇴임 후 알츠하이머 발병을 할 때까지 직접 부엌살림, 빨래와 다림질 등을 하였다. 홍기 여사가 만든 반찬은 최 전 대통령이 특히 좋아하여 식탁을 직접 차렸고, 속옷 빨래는 남의 손이나 세탁기에 맡기지 않고 손수 하였으며, 빨래를 삶는 연탄 화덕은 서교동에 30년 넘게 그대로 남아있다. 25년간 옆에서 보필해온 최흥순 비서실장은 “홍 여사는 전형적인 한국적 부덕을 갖춘 어머니상의 소유자였다”고 쓰고 있다.

홍 여사는 여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우리 때의 훌륭한 주부 모습은 살림 잘하고 자식 잘 키우는 것”이라며 집에서 살림하고 손자하고 노는 것이 좋으며, 여가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고 대답한 바 있다. 여기자들은 김장을 직접 30포기 담갔다는 “소박하고 다소곳하며 서민적인 분위기”의 보통주부 퍼스트 레이디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한다. 반면, 그는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구상 등 바깥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의사를 나타내지 않았다. 청와대 시절 특별히 옷이나 머리를 코디해주는 사람 없이 홍기 여사는 1972년까지 살았던 명륜동의 단골 미용실을 찾았고 퇴임 후에도 명륜동 시장에서 장을 보았다.

동보보육원에 위문선물을 전달하며 원아들을 격려하는 모습.
▲ 동보보육원에 위문선물을 전달하며 원아들을 격려하는 모습.
“신군부 등장 인정 못한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안내책자 봉투 뿌리치기도

홍기 여사는 청와대 시절 양로원과 보육원 지원에만 앞장섰을 뿐 대외활동을 삼갔다. 20~30년 함께 있은 비서들은 영부인이 “공평하고 원칙을 중히 여기며 남편이 청렴할 수 있게 하는 데 내조의 공이 큰 어른”으로 기억한다. 그런가 하면 홍기 여사는 남성 못지않은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주변에서 평하고 있다. “이 나라 국민에게 보여주신 참모습이 있었다”는 것.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남편이 넘겨준 안내책자 봉투를 뿌리친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이것은 곧 신군부 등장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쓴다” 생활철학

 총리부인 때도 콩나물 값까지 기록한 가계부 써

73년부터 살아온 사저인 서교동의 대지 108평, 건평 78평짜리 2층 단독주택을 최 전 대통령은 “살 만하면 그만”이라며 못 고치게 해 남루한 편이었다. 손님 맞기엔 너무 비좁은 4평 거실만 퇴임 5년 후 2배로 넓혔다. 30여년이 된 금성RF-745 라디오, 손 지압기, 곰방대 3개, 50년 된 나쇼날 선풍기, 석유난로, 스크랩을 하는 포마이카 밥상, 하얀 고무신을 남겼다. 뭐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하는 것이 최 전 대통령의 생활철학이다. 창문형 구식 에어컨은 장남이 미국에서 쓰던 것인데 소음 때문에 손님 오기 전에만 켜 방을 식혔다. 약장으로 쓰는 선반에는 한밤중에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도록 약을 정렬해놓고 있었다. 홍 여사가 10년 이상 사용하던 그릇장, 외교관 시절 사용하던 유리잔들, 생전에 사용하던 돌절구와 오이지 누르는 돌, 연탄보일러, 빨래 물을 긷는 펌프가 서교동의 풍경이었다.

여사가 총리공관 시절 쓴 가계부에는 겉장에는 친필로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06, 국무총리 공관, 국무총리 부인 洪基>라 이름표를 적고 있고, 책장을 넘기면 콩나물 등 부식을 구입한 명세가 적혀 있다. 여사는 시어머니의 검박함을 몸에 익혔고, 그리고 남편의 철저한 생활을 같이 도모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식장에서.
▲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식장에서.
69년 결혼생활…최 전 대통령, 아내의 알츠하이머

발병에 간병일지까지 쓰며 성심껏 간호

부부는 69년을 같이 보냈다. 측근들은 “두분은 살갑게 말은 안해도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사랑이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한다. 홍기 여사 마지막 8년간의 투병 중 통산 350여일을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병원을 찾는 것이 최 전 대통령의 일과였다. 간병일지에도 혈압, 혈당의 수치를 깨알같이 적어 내려갔다. 발병 초기에 홍 여사는 남편 외의 사람들이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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