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매듯 살아온 열정 오롯이
불혹 나이에 데뷔…칠순을 넘기고도 식지 않는 문학 열정
나이 들어도 촌철살인 언어 다룰 줄 아는 참 작가
자연 질서·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감사 엿보여

글 쓰는 선배나 후배들 중 누군가가 박완서 선생 댁에 가서 마당에 핀 샛노란 복수초며 민들레, 목련, 조팝나무를 구경하고 왔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나 부러웠었다. 소심한 데다 사교성까지 없는 나로서는 어쩌다 먼발치서 선생을 뵙게 돼도 그 먼 거리에서 수줍게 꾸벅 인사나 한번 드리고 마는 정도였으니, 선생의 마당을 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봄, 드디어 선생 댁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선생을 대표로 해서 무슨 문학상 심사를 한다는 목적으로 꽤 여러 명이서 아치산 선생 댁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맨 처음 대문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싱싱한 연초록 잔디로 빛나는,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소박한 ‘마당’이었다. 그리고 그 마당 가장자리, 앞산을 배경으로 봉오리마다 툭툭 터져 있던 희고 위풍당당한 조팝나무 한 그루. 그 평화로운 풍경에 넋이 빠져 있는데 어느 틈엔가 슬리퍼를 신은 선생이 천천히 그 풍경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식물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새벽녘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선생은 아마 그 때 그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호미’의 어느 한 페이지를 읽다 말고 나는 짐작했다. 선생을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그 연초록 풍경 속에서 훔치듯 보았던 단아하면서도 고독한 얼굴, 그것이 내가 언제나 기억하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선생이 아치산 근방에 집을 짓고 살기로 한 건 온종일 몸 놀릴 일이 없는 아파트가 너무 편해서였다고 한다. 마당이 생기자 선생은 그것을 기꺼이 ‘내 몸에 맞는 불편’으로 받아들이곤 호미를 찾아든다. ‘고개를 살짝 비튼 것 같은 유려한 선과, 팔과 손아귀의 힘을 낭비 없이 날 끝으로 모으는 기능의 완벽한 조화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이다’라는 ‘호미’에 관한 선생의 묘사는 정말로 압권이어서 옛날 여인들이 그랬듯 호미가 든 종댕이(종다래끼)를 핸드백처럼 늘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김매고, 밭머리건 논두렁이건 후비적후비적 심고 거두고 싶은 충동이 절로 든다.

‘호미’는 선생이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산문집이며 거의가 다 70이 넘어서 쓴 글들이다. 선생의 말대로 나이, 이게 거저 먹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어질고 따뜻한 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 그런 것들은 선생의 나이쯤에서야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닐까.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고 선생은 말한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그 김매기의 시간 속에는 1970년 불혹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후 여전히 젊은 문학정신으로 쉬지 않고 글을 써왔던 40여년의 세월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몇년 전에 가깝게 지내는 소설가 S 선배와 둘이 차를 마시는데, 그날 따라 선배는 유독 박완서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촌철살인의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작가가 우리 문단에 선생 말고 누가 계시냐? 했다. 나는 그 말을 나이가 들어도 선배도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선배의 나이가 박완서 선생이 막 문단에 데뷔하던 나이였고, 지금은 나도 그 나이가 되었다.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은 순간 많아도 ‘호미’를 다 읽고 나니 이 고단한 생의 김매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작정이 든다. 그러다보면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 것 없다고 해도 김맬 터전이 있다는 걸 나 또한 위안으로 삼게 되지 않을까.

‘호미’는 날마다 선생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로 꾸려진 책이다. 그리고 변치 않는 영원한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차가움과 뜨거움, 고통과 행복을 가져오는 외부의 관계들은 왔다가 간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 프란시스코의 말처럼 손으로 일하는 사람은 노동자다. 손과 머리로 일하는 사람은 장인이다. 손, 머리, 그리고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은 예술가다. 선생은 엄정한 리얼리스트이며 진정 예술가다. 올해도 봄이 오면 선생의 마당엔 어김없이 산수유, 복수초, 목련, 매화, 살구, 자두, 조팝나무들이 앞 다퉈 꽃을 피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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