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않는 세상

나는 TV 드라마를 꼬박꼬박 보는 편이 아니다. 특별히 고상해서가 아니고 얼마 전부터 귀에 이상이 생긴 후 텔레비전을 트는 횟수를 줄이다보니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났을 때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일부러 찾아서 재미있으면 지속해서 보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굳이 말하자면 능동적으로 TV를 즐기지는 못한다. 가끔 보면 그 드라마 속의 리얼리티가 참으로 민망할 정도여서 소설이 드라마를 따라가지 못하겠구나 하고 느낀다. 게다가 텔레비전 화면의 질이 점점 좋아지니까 탤런트들의 얼굴이 어찌나 뚜렷하게 다가오는지 집안 식구들의 얼굴보다 더 자주 자세히 들여다보게 생겼다.

얼마 전 인기 드라마에 나오는 한 탤런트가 결혼한다고 떠들썩하더니 곧 파경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물론 이 화제가 내년까지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새해 첫날부터 굉장했었다. 나도 그 드라마는 즐겨 보아서 그 여자 탤런트가 부드러운 천사 역할을 하는 걸 보았다.

그런데 모두들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착한 여자의 얼굴에다 폭력을 가할 수가 있느냐는 거였다.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는 걸 보고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거기다 대놓고 그건 드라마잖아, 허구잖아, 그런 일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했다간 손가락질당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드라마에 몰입하면 저렇게 될까. 얼마나 드라마를 잘 만들었으면 그 속의 이야기를 모두 사실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뒤집어서 생각하면 드라마에 나온 탤런트들도 그 역할에 너무 열중하고, 집중하다 보니 현실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내 딸의 나이도 안된 젊은이들이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괴리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한 이면에는, 스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부터 종말까지 그 그늘이 너무 짧고도 짙어 보인다.

허망함이 보이는 결말이라도 좋아라 하고 열정적으로 뛰어들며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 풍조가 너무 강하게 지배하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은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기도 힘들 때가 많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